200년 된 감나무가 있는 집
200년 된 감나무가 있는 집
  • 승인 2015.11.1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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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시인
겨울로 가는 늦가을 하늘, 붉은 감 두 개가 신호등처럼 걸려있다. 이름 하여 까치 밥! 눈여겨보니 벌써 새들이 부리로 시식(試食)한 자국이 역력하다.

지난날 식생활(食生活)이 어렵던 시절 감나무는 굶주린 아이들에게 구세주였다. 초여름에는 감꽃이 허기진 배를 달래주기도 했다.

이른 새벽같이 일어나 감꽃을 주우러 가면 땅을 밝히는 하얀 감꽃들이 등불 같았다. 나보다 먼저 깨어난 벌들은 벌써 감꽃을 파고 들어가 채밀(採蜜) 작업으로 바지런을 떤다.

지금 생각해도 미물이지만, 기특하다. 그때는 윙윙거리는 벌 소리가 마치 아름다운 종소리 같았다. 감꽃에 이어 떨어진 풋감도, 심심풀이 간식(間食)이 아니라 늘 배고프던 그 시절에는 성찬(盛饌)이었다.

필자가 어릴 적 살던 고가(古家)는, 집 구조는 평범한 초가(草家)였지만 마당이 150평이나 되는 꽤 넓은 집이었다. 뒤뜰의 감나무는 지금 살아계시면 145세가 넘는 할아버지께서 일흔이 넘어 얻은 손자를 위하여 심어놓으시고, 몇 해 안되어 세상을 뜨셨다. 푸른 감나무를 보면, 이 못난 손자에게 너도 저 감나무처럼 푸르게 자라고 크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듯했다.

감나무 덕분에 6·25 북새통에는 가까스로 폭격기의 폭격을 감나무 밑에 용케 숨어 면한 적도 있었다. 우리 집 뒤뜰의 감나무는 뾰족 감으로 감 알이 크고 딴 집 감보다 일찍 익고 맛도 좋아 동네 아이들이 감나무 때문에 나를 가까이 하려 애썼다.

전쟁이 불을 뿜던 1952년! 그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저학년 때는 연필 사용만을 강요당했지만, 5학년이 되고부터는 연필 뿐 아니라 잉크 사용도 허용되었다. 만년필이 갖고 싶던 나는 탄피를 이용하여 교모하게 모조 만년필을 만들어 사용했다. 내가 간절히 만년필이 갖고 싶은 것을 안 어머니는 감 한 접을 판 돈으로 선뜻 고급 만년필을 사 주셨다. 만년필이 귀하던 시대에, 고급 만년필을 갖게 되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내 만년필은 담임선생님께 징발(?)되어 출결을 매기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애지중지하던 만년필의 촉이 얼마 써보지도 못하고 부러져 못쓰게 되었다.

일제 만년필이 되어 부품을 갈아 넣을 수 없어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한 달도 사용 못했으니, 사랑땜도 제대로 못한 셈이다.

내 만년필에 눈독(?)을 들이던 고종 사촌형이 고장난 만년필을 갖는 대신, 체면땜으로 월간 아동잡지 ‘소년세계’를 한 권 사주었다. 얄팍한 그 아동잡지가 과학자 쪽으로 행하던 내 인생의 항로를 문학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 때 우연히 이주홍 선생이 지은 감동적인 소년소설 ‘아름다운 고향’을 소년세계에서 처음 만났고, 6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독자란에 실렸던 ‘어머니 생각’이라는 동시(童詩)가 잊혀지지 않는다.

어머니 생각

누나 따라 / 시골길/ 피난 갈 때에/ 고향에 홀로 남은/ 어머니 생각.

불과 다섯줄 밖에 되지 않았지만 6.25 피난 시절의 참상을 너무 잘 그렸다. ‘어머니 생각’을 지은 소년 시인이 지금은 칠순이 넘은 노인이 되었겠지만 궁금한 그 이름은 지난 세월만큼 멀기만 하다.

고종사촌 형이 사준 소년세계 한 권이 나를 평생 문학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게 만들었다. 없는 살림에 무리하게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재산이라곤 초가 한 채 뿐이었는데 그것마저 빚잔치를 하려고 헐값에 팔고 말았다.

가을이면 홍조(紅潮) 띤 얼굴을 자랑하던 감나무도 집이 팔리고 나서 몇 해 안되어 베어지고 말았다.

그뿐인가 우리에게 집을 산 새 주인은 집을 되팔아 새로 들어온 주인이 집을 헐고 새로 지어 내 어릴 때 추억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던 ‘감나무 있는 집’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감나무가 사철 내 희망이 되어 주었던 어린 시절 옛집이 그리워 ‘고가(古家)’라는 단시를 지어 아쉬움을 달랬다.

고가(古家)

삶의 밀물 따라/ 오고 가는 후조(候鳥)들아/ 대(代)를 이어 살던 고가(古家)/ 누구네가 솥을 건고?/ 오늘도 뒤뜰 감나무만/ 푸른 꿈이 여무리.

오두막집일망정 내 집이 지상 낙원보다 낫다는 평범한 진리를 셋방살이 8년 만에 터득하게 되었다.

실가(失家)의 한(限)을 풀게 한 새로 마련한 집에 몇 해 전 단감나무를 심었는데, 감 알이 굵고 가지가 찢어지게 달려도 낙과(落果)가 되지 않아 복 받은 집이라는 이웃의 덕담(德談)이 듣기 싫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심은 감나무가 손자인 내게 많은 추억을 안겨 주었듯이, 내가심은 저 감나무도 거목(巨木)이 되어 내 아들과 손주들에게 고향의 추억을 푸짐하게 안겨줄 수 있으리라.

오늘도 나는 마당의 감나무와 눈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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