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 승인 2016.03.0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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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전 중리초등학교장
예임회에서 문화기행을 포항에 있는 장기초등학교로 갔다.

그 곳엔 장기읍성, 우암 송시열 유배지,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가 있다. 특히 장기초등학교엔 우암이 심었다는 320년이 훨씬 넘는 은행나무가 있고, 다산이 220여 일을 유배한 흔적들이 교정에 남아있어 역사적인 사실들이 있기 때문이다.

경유지로 경주 토함산 기슭에 있는 동리·목월 문학관을 들렸다. 김동리 작품 전시실에서 연보와 문학세계를 감상하다가 동리 선생이 세로로 써 놓은 ‘춘풍대아능용물(春風大雅能容物)’과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이라는 액자가 오른쪽과 왼쪽 부분에 마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물 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두 글귀는 학자들이 흔히 대련(對聯)을 말할 때 인용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문방사우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어 동리 선생이 부단히 갈고 닦았을 필체 또한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유독 눈에 띄는 ‘가을물 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는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은 등단작인 ‘화랑의 후예’이후 장편 ‘을화’까지 여러 작품 곳곳에 맑은 문장으로 나타나 있다.

문학인으로 생활하면서 신념이 된 이 글귀는 어쩌면 김동리 선생의 평생 좌우명일 것이다.

사실 이 글은 추사 김정희의 대련 작품으로 더 유명하고 널리 알려져 있다. 몇 년 전 충남 예산의 추사 김정희 고택을 방문하였다가 주련(영련)에서 똑같은 글귀를 읽었었다.

추사 고택에는 기둥마다 추사체의 글씨로 많은 글들을 써놓고 밑에는 한글로 해석을 한 코팅 쪽지가 있었다. 한자에 거부감을 가지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겐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조상의 얼을 되새겨 현대 사회에 적용하는 방법으로 입고출신(入古出新)하기에 딱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 것을 받아들이고 새것을 창출하는 방법으로는 그야말로 제격인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연경에 동지사로 따라갔다가 금석학의 대가인 청나라의 옹방강을 만나서 많은 감화를 받는다. 당시 청나라의 서예가들은 옛것을 익혔고, 그것을 본받아 새것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말이 입고출신(入古出新)이다.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옛것을 따사롭게 하고 새로운 것을 안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보다도 더 강한 느낌이 드는 말이다.

옹방강의 사위 과선주는 유용의 제자였다. 장인인 옹방강은 옛것에 너무 치우쳤고, 스승인 제자는 진취적 기상으로 새것에 치우쳤다고 한다. 과선주가 장인인 옹방강에게 ‘우리 선생님 글씨는 어떠합니까?’하고 물으니 ‘너 스승의 글씨 어디가 입고(入古)냐고 물어보아라.’하였다고 한다.

과선주가 스승인 유용에게 가서 ‘우리 장인의 글씨는 어떠합니까?’하고 물으니 ‘너의 장인에게 가서 어디가 출신(出新)이냐고 물어보아라.’하였다고 한다.

입고출신 이야기는 유홍준의 완당평전에 나온다.

목월 작품 전시실에는 단연 ‘나그네’의 시가 눈에 띄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

이 시는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이라는 시를 받고서 쓴 답시이다. 완화삼은 ‘꽃을 희롱하는 적삼(윗도리)’이라는 뜻이다.

아마 사람의 걷는 동작에 따라서 적삼의 흔들림이 마치 꽃을 놀리듯 하여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이리라.

…/구름 흘러가는/물길은 칠 백리/나그네 긴 소매/꽃잎에 젖어/술 익는 강마을의/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과 박목월 두 시인의 글은 ‘가을물 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는 추사의 표현 그대이다. 동심이고 아름답다.

포항시 장기초등학교에 도착하였다.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나를 닦아 바름을 세우다.’는 수신위정(修身爲正)의 기념비가 있었다. 교정에는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의 행적 비문이 있었다. 우암이 심었다는 은행나무는 일부는 고사하고 새싹이 옆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 학교 졸업생인 김종한 교장, 김수봉 교장의 안내로 교내 역사관을 둘러보았다.

장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진출이 두드러진 본받을만한 졸업생들이 많았다. 이름난 사람이 머물러 있던 장소를 장구지소(杖?之所)라고 하는데 유배지도 그런 장소가 되는 모양이다.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한다’는 의미를 장기에서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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