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현수막 들고 지구촌 누빈 7년, 조각을 확장하니 예술이 보였다
폐현수막 들고 지구촌 누빈 7년, 조각을 확장하니 예술이 보였다
  • 정혜윤
  • 승인 2016.04.14 00:0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재철 ‘실크로드 프로젝트-기록’展
실크로드·이란·터키·독일·런던 등
세계각지에 폐현수막 나눠주고
사용현황 기록한 ‘아트 프로젝트’
내달 22일까지 봉산문화회관 전시
249A0319
조각가 정재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기록 2016’전이 봉사문화회관 4전시실에서 5월 22일까지 열리고 있다. 천장의 차양막은 폐현수막으로 만든 작품.

세계 각처의 레지던시에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이 몰려든다. 화가에게 레지던시는 여행의 다른 이름이다. 많은 경우 낯선 공간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며 새로운 창작의 전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레지던시는 일탈의 탈출구이자, 새로운 창작의 전진기지가 된다.

조각가 정재철(56)이 2004년 3월에 불쑥 바랑을 챙겨 실크로드 여행길에 오른 배경에는 ‘삶이 예술이고 여행이 미술이다’라는 평소의 지론이 작용한 탓도 있지만, 창작의 전기를 모색할 탈출구가 필요했던 이유도 컸다. 그는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에 맞닥트렸을 즈음 여행길에 올랐다.

사실 그는 중앙미술대전 조각 대상(1988), 김세중 청년조각상(1996) 등을 받으며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조각가였다. 하지만 90년대 당시 생산성과 효율 우선시 현상과 교환가치의 상징체계로서의 조각 개념이 팽배해지는 국내 분위기를 지켜보면서 매너리즘에 빠졌다. 여기에 특정 지역과 계층에 한정된 현대미술의 현주소에 대한 반성이 겹치면서, 실크로드로 현대미술의 편협된 공간성을 확장해보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7년에 걸친 대장정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IMG_1493
정재철 조각가
정재철이 실크로드와 현대미술의 매개체로 선택한 대상은 폐현수막이었다. 서울과 경기도의 구청에서 거둬들여 세탁한 폐현수막 2,000여장을 7년 동안 3차에 걸쳐 실크로드 구간의 지역현지인에게 뿌렸다.

그가 현지인에게 내건 미션은 “자유롭게 사용해 달라”였다. “나눠주는 폐현수막이 구호물자가 아니라는 것과, 현재 진행하는 일이 ‘아트 프로젝트’라는 것을 현지인들에게 명확히 설명했어요.”

중국과 파키스탄·인도·네팔 등을 거치는 1차 프로젝트에서는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현지인의 자유로운 활용을 권장했다. 그리고 6개월 후 다시 프로젝트가 진행된 지역을 찾아 현지인들의 폐현수막 사용현황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들은 폐현수막을 대개 햇빛 가리개와 차양막, 그리고 베갯잇과 벽 가리개, 커튼, 가방과 모자 등의 생활용품으로 활용하며 용도변경 하고 있었다.

2008년 1~10월까지 진행된 2차 프로젝트에서는 파키스탄·이란·터키의 시장 사람들에게 폐현수막으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달라고 구체적인 주문을 넣었다. 2차부터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기 시작한 것. 2차에서는 ‘개인회생·파산’이라고 적힌 노란 현수막에 빨간 테두리를 두르고 빛깔 고운 수술을 달아 화려하게 치장한 차양막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정재철은 이 작품을 블루모스크가 보이는 광장에 설치하고 사진을 찍었다.

3차 프로젝트는 2009년 1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진행됐다. 터키·그리스·세르비아·불가리아·헝가리·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등을 거쳐 영국 런던까지의 여정이었다. 3차는 작가의 주도적인 역할이 더욱 강화됐다. 폐현수막으로 햇빛 가리개를 미리 만들어 각 도시의 주요 지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퍼포먼스를 펼쳤다.

수많은 현지인이 현대미술 프로젝트에 가담한 7년간에 걸친 대서사에서 정재철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는 여러가지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했다. 프로젝트 이후 국내 유수의 다양한 전시공간에서 그의 성과물을 앞다투어 전시한 것을 반추해 보면 그의 일리 있는 자평에 수긍이 갔다. “일단은 ‘조각가’에서 ‘전방위미술가’로 예술적 범위를 확장한 것이 수확이에요. 여기에 ‘감상자의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미술’을 보여주며 현대미술의 공간적 지평과 조각의 가능성을 넓혔다는 것도 중요한 수확물 중 하나죠.”

이번 봉산문화회관 ‘실크로드 프로젝트-기록 2016’전에서는 프로젝트가 진행된 지역과 정보를 담아놓은 드로잉과 기록물로 남긴 사진과 동영상, 현지인들이 폐현수막을 이용해 만들었던 햇빛 가리개를 복제한 작품 등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2층 4전시실에서 5월 22일까지. 053-661-3500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