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파수 맞는 사람 찾아 거리로…“괴짜라 불려도 좋다”
주파수 맞는 사람 찾아 거리로…“괴짜라 불려도 좋다”
  • 황인옥
  • 승인 2017.07.0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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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화가 정 경 상
서점·대중교통·도서관 등
곳곳 다니며 피사체 찾아
5~10분이면 작품 ‘뚝딱’
특이한 행동에 오해받기도
“장승업 자유로움 닮고 싶어”
화가
거리화가 정경상이 대구 교보문고에서 그린 인물 드로잉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경상작
정경상 작.
일상이 수상한 남자가 있다. 오전에 집을 나서면서부터 그의 행동은 예사롭지 않다. 일단 그가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일시에 긴장감에 휩싸인다. 이 수상한 남자가 승객들을 뚫어져라 응시하기 때문이다. 이내 남자가 신문지를 펼치고 현란한 손놀림으로 크로키를 시작하면 5~10분이면 거뜬히 드로잉 하나를 완성된다. 하지만 승객들은 그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기 일쑤다. 누군가가 자신을 훔쳐보고, 그림의 모델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경계를 표하기 때문이다. 심할 경우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는 거리의 화가로 살고 있는 정경상 씨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들이 있다. 그 대상을 포착할 때까지 2~3시간을 버스를 탈 때도 있다. 막상 마음을 건드리는 대상이 나타나면 순식간에 그려낸다.”

버스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완성하면 발걸음은 도서관으로 향한다. 현대의 도서관은 독서 외에도 컴퓨터실, 시청각실, 전시실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북적되고 있어 그에게는 다채로운 인물을 만날 수 있는 보물창고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수상한 취급을 받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훔쳐보고 그린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대다수다.

“시를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성향이 도서관을 선호하게 하는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만나면 예술혼이 한 올 한 올 살아 꿈틀대는 것 같다.”

도서관에서의 작업이 끝나면 간혹 서점을 들르기도 한다. 한때 서점은 그의 작업이 집중됐던 곳이다. 10여년 동안을 대구 중구에 있는 교보문고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크로키 작업을 해 왔다. 이 장소 역시 그를 불편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상(?)하게 그림을 그리는 그를 손님들은 달갑지 않아 했고, 교보문고측은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 그리기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꺾인 적이 없었고, 하루에 20~30여장의 드로잉을 매일 그려냈다. 그렇게 수상하게 그린 드로잉이 3만여 점이 넘는다.

“교보문고에서 그린 드로잉을 보고 교보문고 대구 임원이 전시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 전시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그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전시는 성사되지 못했다. 교보문고 측에서 보면 좋은 홍보가 될 수 있었을 것인데 안타까웠다.”

정경상은 하루 종일 도심의 곳곳을 떠돈다. 감성을 자극하는 대상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의 예술적 촉을 건드리는 대상은 주로 소시민. 그들의 소소한 일상이 드로잉으로 신문지에 담긴다. 거리에서 완성한 드로잉은 집으로 돌아와 크레파스로 색을 입혀 완성한다. 그 사회의 모든 정보가 담겨있지만 정보 전달의 목표가 달성되면 흔하게 버려지는 신문과 소시민이 묘하게 닮아있어 선택한 재료다. 하지만 무엇보다 크레파스와 신문지는 캔버스나 물감을 살 수 없어 선택한 호구지책이다. 그는 가난한 거리의 화가다.

“신문지나 잡지 등 버려진 것과 크레파스를 화구로 사용하는 것은 경제적인 여건에 따른 고려이기도 하다. 나는 꼭 필요한 만큼의 일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린 지는 30여년이 됐다. 어린 시절 만화를 곧잘 그렸던 그가 군 제대 후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무보수로 일을 했다. 하지만 극장 간판이 실사 프린트 사진으로 대체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그의 그림 배우기는 끝이 났다. “간판 일을 배우면서 사실주의 인물화를 그려서 전시회도 했다.”

어느 화가의 화실에서 어깨너머로 그림의 기초를 배우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오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화실에서의 경험은 순수미술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이후 상업미술에서 순수미술로 전환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독학뿐이었다. 환경이 어려운 만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리고 또 그리며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었다.

도심의 거리를 헤매며 인물크로키를 그리기도 하고, 여행을 다니며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다.

화풍을 가리지 않고 지독하게 그렸고, 그러면서 서울에서 상업미술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도 했다.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 수출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하지 못하고 20대 후반부터 막노동을 전전했다.

“내 그림의 수준을 알고 싶어 신문에 실린 서울 중앙대의 어느 미술대학 교수님의 기사를 보고 무작정 찾아가 그림 평을 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철학적인 바탕이 부족하고 작업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가리지 않고 많은 그림을 그렸고, 그리면서 배워갔다.”

한때 그림을 손에서 놓기도 했다. 먹고사는 일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막노동을 전전하며 10여년을 그림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이다.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우울증으로 이어졌고,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생전에 어머니를 그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세상 밖으로 다시 나왔고, 어머니 대신 거리의 소시민들을 신문지에 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그리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그림은 어머니가 주신 선물인 것 같다.”

버스 좌석에 아이를 업고 앉은 여인, 책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발랄한 여대생, 도서관에서 잡지를 넘기는 노파 등이 그의 손끝에서 투박하지만 살아 꿈틀대는 생동감으로 되살아난다. 인물 드로잉을 주로 그려왔지만, 그리고 싶은 것은 많다고 했다. 저항의 현장에서 치열한 한 순간을 포착해 보기도 싶고, 지나간 역사적인 사건들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여러 곳에서 일을 했지만 문둥이 촌에서 일한 경험은 특별했다. 그런 경험들이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애 주었다. 그런 제한 없고 편견 없는 경험들이 그림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자신의 그림을 조선의 풍속화에 빗댔다. 그러면서 신윤복과 김홍도를 언급했다. 소시민의 일상을 그렸다는 점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 하지만 정작 그가 좋아하는 화가는 오원 장승업이라고 했다. 어디에도 걸림 없이 자유를 갈망했던 장승업의 정신을 닮고 싶다고도 했다. 그런 얼굴에서 장승업의 뜨거운 열정이 겹쳐졌다.

정경상이 최근 세상과 소통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용학도서관이 다가오는 가을, 독서주간 즈음에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 김용락과 정경상의 시화전을 기획했다. 용학도서관이 거리의 화가 정경상을 지원하기 위해 기획된 이 시화전에는 김용락의 시와 김용락의 시를 시각적으로 재해석한 정경화의 작품이 소개된다. 특히 이 전시는 작품 제작을 위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사전 작품 판매가 진행되고 있다. “용학도서관과는 크로키전을 기획해 준 인연이 있다.”

정경상의 가능성은 아직 세상에 제대로 발현되지 못했다. 신문지와 크레파스에 그려낸 그림이 그의 전부일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역시 지금이 그림에 대한 갈망이 최고조에 달한 것 같다고 했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화구에 구애 없이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부족해서 더 간절한 정경상. 간절함보다 더한 자산이 또 있을까? “야생마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소시민의 애환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잘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여건이 열악해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런 만큼 그림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 강하다. 그 강한 열망을 신문지에 계속해서 녹여내고 싶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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