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아무리 자기꺼라 우겨도…김치는 우리것!
중국이 아무리 자기꺼라 우겨도…김치는 우리것!
  • 박용규
  • 승인 2021.04.14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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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11) 김치의 본향 달구벌 - 2
김치 = 빠오차이 ?
중국식 절임채소 ‘빠오차이’
김치보다는 오이피클 가까워
中 “韓보다 소급연대 앞서” 주장
 
시경김치원조가
최근 중국에선 김치가 빠오차이(泡菜, pickle)에서 기원했기에 한국보다 앞서고 있다는 주장이다.

최근 중국에선 김치가 빠오차이(泡菜, pickle)에서 기원했기에 한국보다 앞서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들의 증거로는 예기(禮記禮運)에 “대체로 예의 시작은 음식에서 시작되었으며... 밥과 생선과 김치를 영전에 바쳤다(禮運曰,夫禮之初,始諸飮食.. 然後,飮腥而저孰).”에서, 김치의 소급연대를 공자생존(BC 500년대) 이전으로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출판번역책 가운데 ‘저숙’이라는 단어를 ‘김치(kimchi)’로 번역하는 자승자박을 계속하고 있다. 명문대학교 유명한 교수도 맥락을 무시하고 글자만 해석해서 김치라고 한다. 중국의 옛날 주석전문가들은 “김치가 아니다”라고 해왔다. 그 이유로 첫째는 ‘저’는 부추와 같은 잎채소(菜) 혹은 오이 등의 절리기 음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나, 둘째로는 숙(孰)는 예기(禮記) 전반에서 음식 익힘(孰)으로 내칙(內則)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셋째로는 상통관계를 이용해서 도마(俎) 혹은 존이(尊彛)와 같은 제기(祭器)를 뜻하고 있다. 당나라의 주석학자 육덕명(陸德明)은 ‘저’를 ‘포장함’함으로 해석했고, 후한의 정현(鄭玄)은 ‘저숙’을 존이(尊彛)라는 술독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김치(kimchi)와는 아주 무관한 사항이다.

또한 BC 10세기에서 BC 7세기까지 중국민속가요를 모아 편찬된 시경(詩經)에서도‘소금절림(菹)’이란 음식이 나온다. 즉 원문엔 “밭 가운덴 오두막집, 밭둑에 오이가 주렁주렁 열렸네. 이놈의 오이 따 이렇게 소금에다가 푹~ 절였다가, 조상님들께 오이저리기를 바친다면, 오래 전부터 자손들은 오래 살았으니, 하늘의 보살핌을 받음이 아니겠는가?(中田有廬, 疆場有瓜, 是剝是菹, 獻之皇祖, 曾孫壽考, 受天之祐)”라는 구절을 우리나라 한문학자들은 이것마저 김치(泡菜, cucumber pickle)라고 해석하고, 우리나라 김치(酸菜)가 중국이 기원이라고 강변하는데 동조근거로 삼는다.

그렇다면 이런 내용은 왜 애써 외면하는지? 삼국지 동이전(三國志東夷傳)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음식을 발효시켜 먹는 걸 좋아했다(高句麗人善於釀醬)”라는 구절은 과거 중국인들마저도 발효김치를 만들어 먹었다고 인정하는데도 우리는 부정하고 있다.

한편 오늘날 우리민족의 애환과 같이 숙성되어 온 김치는 1985년 정광태(鄭光泰, 1955년생)의 ‘김치주제가’라는 노래를 계기로 동요 김치 송(song)이 많이도 유행했다.

2003년 SARS에 한국인만 무사하자 “김치를 먹었기에 사스에 걸리지 않았다.”고 김치가 방역식품(quarantine food)으로 등극했다. 우여곡절 끝에 2013년 12월 5일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김장문화(Kimjang : Making and Sharing Kimchi in the Republic of Korea)를 인류무형문화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 등재했다. 김치는 한민족의 영혼을 만들어온 음식(soul food for Korean Nation)으로 이제는 “김치 없이 못 살아(can’t live without kimchi).”라고 할 정도로 되었으며, 김치 만들기를 통해 지역사회에 문화계승, 정보교환, 인정 나누기 및 고부세대간(姑婦世代間)의 융합 등을 보존하겠다는 차원에서 등록되었다.

2016년 성주(星州)에 대북방어용 샤드(THAAD, 薩德)를 배치하자 중국은 한국보복차원에서 “한국고유음식 김치 거래제한”조치를 취했다. 일본 역시 2019년 한국 대법원에서 “일제 징용공 보상(日帝徵用貢報償)”판결을 하자 경제보복차원에 한국 고유음식 김치수입제한을 실시했다. 그럼에도 2020년 12월 중국과 일본은 “김치는 중국기원에서 한국으로 전파된 음식(キムチは中?起源で韓?に?播された食品)”이라고 공동대응에 나셨다. 중국은 관영언론 환구시보(環球時報)를 통해서 김치종주국임을 주장했고, 재미중국대사는 김치 담그기 동영상을 방영했다. 이를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주한외국대사들은 자율적으로“김치챌린지(Kimchi Challenge)”를 전개했다.

 

한민족의 음식
청동기시대 유물 팽이형 토기
땅에 묻어 김치 숙성 안성맞춤
김장문화 유네스코 등록되기도


우리나라의 김치는 “소금 저리기”보다 땅속(용기)에서 숙성시킴으로써 제 맛을 만들어 내었다. BC 1,000년에서 AD 3세기까지의 한반도 청동기시대에 사용했던 팽이형 토기와 신라갓김치의 연유에서 시작된다. 팽이형 토기는 한 마디로 김칫독이었다. 팽이형 토기는 일반적으로 독(甕)모양과 항아리(壺)모양으로 양분하는데, 옥산가마터의 신라팽이형토기는 깔때기(funnel) 혹은 나무팽이(wooden top)처럼 끝이 뾰족하고 아가리(甕口)가 넓어서 땅에 묻어 갓김치 숙성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때로는 2개로 장독과 뚜껑으로 사용하기엔 제격이었다.

이렇게 땅속에서 숙성시킨 서양음식으로는 BC 1,290년 경 유대인지도자 모세가 430년간 노예생활을 했던 유대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해 40년간 광야생활을 할 때 특히 와디럼(Wadi-Rum)사막에서 유목인 배두인(Bedouin)으로부터 대접받은 “사막에 묻었던 양고기(mujariff)”가 있었다. 동양 중국에서도 주나라(周)의 팔진미 가운데 하나인 약초와 점토로 싸서 구웠던 포돈과 유사한 중국남부 항주(杭州)의 음식 ‘거지닭고기’ 혹은 ‘지아오화지’가 지금까지도 전승된다. 음식스토리는 거지들이 닭서리를 해서 익모초(益母草) 혹은 연잎(荷葉) 등으로 싸고 그 위에 다시 황토를 발라서 땅에 묻었다가 필요할 때에 요리해 먹는 데에서 기원했다. 물론 이를 맛있음을 과시하고자 건륭제(乾隆帝, 1711~1799) 황제와 연결되는 즉흥스토리(ad-lib story)까지 만들었다.

◇ 천계신화(天鷄神話)의 금계국(金鷄國) 신라

먼저 닭(鷄,cock)에 대해 알아보면, 중국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시각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가축으로 어찌 해(奚)자와 새 조(鳥)자가 결합한 글자이며, 당나라의 음으로 계다”로 풀이하고 있다. 어릴 때에 서당에서 훈장으로부터‘빈계사신(牝鷄司晨)’이라는 용어 해설을 들었다. 선배로부터 ‘닭 벼슬(鷄冠)’에 대해서 “닭 벼슬은 인간에게 정확한 시각을 알려주는 공으로 조물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는 증거다.”는 고사를 들었다.

시골 예천에서는 닭에 대해 “달구새끼, 달구발, 달구똥, 달구지랄, 달구집, 달구모이..”등의 말을 들으면서 성장했다. 옛 신라였던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일부에 살았던 사람들은“ㄹㄱ”받침을 ‘ㄹ’로 발음하는데 서울사람들은 ‘ㄱ’로 읽는다. 해당단어로는 읽다(read), 밝다(bright), 맑다(clear), 긁다(scratch), 붉다(red), 굵다(thick), 늙다(be old), 묽다(watery), 얽다(entangle), 닭(cock), 흙(soil), 까닭(reason) 등이 있다. 특히 닭(cock)을 ‘달구(dalgu)’로 발음하는 옛 신라지역이었던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사투리로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예천, 문경, 안동 등지에서는 훈민정음(訓民正音)에 나오는 나무(木, 남ㄱ)와 구멍(空, 굼ㄱ)의 기역(ㄱ)곡용현상(曲用現象)까지 아직도 남아있어 “나무를 하러가자”를 “남구를 하러가자”로 “구멍에 든 뱀”을 “굼게 든 뱀”으로 발음한다. 강원도에서 ‘나무’를 ‘낭구’혹은‘낭기’로 발음한다. 어릴 때 즐겨 부렸던 동요 “새는! 새는! 남게 자고요. 쥐는! 쥐는! 궁게 잔데요.”라고 불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직도 경상도(대구) 사투리를 하는 사람들은 수구리(숙여라), 꾸구리(굽혀라), 쪼쭈바리(쫓아붙어라), 쭈구리(쭈그려라) 등을 정확한 어원도 모르게 말한다.

오늘날 콤팩터(compactor), 콤비롤러(combi-roller) 등 땅다지는 기계가 만들어지기 이전 옛날엔 달구(dalgu)라는 물건이 있었다. 디딜방아의 호박돌, 연자방아 돌, 큰 맷돌 등으로 오랫동안 사용하면 가운데 구멍이 생긴다. 이 구멍에다가 나무가름대를 대고 여러 갈래의 새끼줄을 묶어서 강(못)둑, 성터, 집터, 뫼(모덤) 등을 다지는데“다짐 돌”로 사용했다. 이 돌을 ‘달구(혹은 망깨)’라고 했다. “달만한 돌절구”이라는 준말로 달구라고 했다. 이것으로 여러 사람들이 하는 다짐작업을 “달구질(망깨질)”이라고 했다. 이때에 불렸던 노동요를 “달구소리(망깨소리)”라고 했다.

“어허 달구! 어허- 어- 달구로다! 삼세 번째 들어 달구. 사공이랑 황당할망정 역준님네 일심동체 천초만년 살 집을 석곽 같이 다려줍서...”라는 부르면서 작업피로까지 잊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달구질(작업) 혹은 망깨질(작업)이라고 블렸으며, 대구 달성군 하빈면엔 ‘망깨소리’라는 전래 노동요가 현존하고 있다.

대구의 옛 지명은 달구벌(達句伐)이다. “닭을 닮은 혹은 닭을 상징하는 백리 벌(鷄似鷄意百里砂野)”이란 뜻으로‘달구벌(達句伐 혹은 達句火)’ 혹은 ‘닭벌(達火, 達弗)’이라고 불렸다. 1955년 대구시 지방자치제 실시 기념행사 당선작이었던 백기만의 ‘대구시민의 노래’에선 “팔공산 줄기마다 힘이 맺히고, 낙동강 굽이 돌아 보담아 주는 질펀한 백리 벌은 이름난 복지(福地)”였다. 또한 ‘능금 꽃 피는 고향’유행가에선“능금 꽃 향기로운 내 고향 땅은 팔공산 바라보는 해 뜨는 거리”다. 그곳에선 “그대와 나 여기서 꿈을 꾸었네. 아름답고 정다운 꿈을 꾸었네.”지질학 상으로 1억 4천만 년 전, 백두산 천지연(白頭山天地淵) 13배나 되는 거대한 달구벌호수, 하늘 전체가 다 비춰지는‘삼한의 신비경(三韓秘鏡)’이었다. 계명세명(鷄鳴世明) 순서에 따라 달구벌에 닭들은 새벽을 알렸고, 하늘엔 문이 열리면서 해가 솟아올랐다. 이런 계명세명신앙(鷄鳴世明信仰)은 성경(Matthew 26:34)에도 나오고, 지금도 파리 노트르담 성당(Notre Dame Cathedral, Paris) 등 유명한 성당첨탑에 수탉 조각상을 안치하고 있다.

글·그림 =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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