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려한 자태·뛰어난 약효…“조선의 장미계, 닭 중의 닭”
수려한 자태·뛰어난 약효…“조선의 장미계, 닭 중의 닭”
  • 김종현
  • 승인 2021.09.1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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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31) 장미계, 삼계탕, 계삼탕, 백숙
장미계의 특징
꼬리가 가늘고 길이가 5척 넘어
약효와 맛, 모든 닭 가운데 최고
‘국왕의 상징’조선 궁정서 사육
삼계탕, 원래는 계삼탕
천계신화 갖고 있던 신라
닭 앞세우고 삼을 뒤세워
1960년 인삼 내수판촉 전략
삼계탕이라 바꾸고 대중화
신라장미계
신라장미계는 현재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림 이대영

◇제물(祭物) 계탕, 약치 웅계탕 그리고 천하일미 장미계탕

닭에 대해서 BC 256년 이전 기록이었던 서경에 ‘암탉이 새벽을 맡을 수 없으니, 암탉이 새벽에 운다면 그 집을 오직 꼬여 망할 뿐이다(牝鷄無晨, 牝鷄之鳴, 惟家之索).’라는 세태기록이 있었다.

최근에 와서 ‘암탉이 울면 알을 낳는다(When a hen cries, it lays eggs).’라는 기고문이 영남 유림의 본산이었던 대구지방 신문에 올라옴을 볼 때에 세상이 많이 변했다. 삼국사기에서도 ‘국왕이 밤중에 금성서쪽 계림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포공을 보내서 그곳을 살펴보게 했다.’라는 천계계림설화가 있다.

일반적으로 BC 1700년경에 인도에서 야생 닭에서 가축으로 사육하게 되어 신라로 들어와서 천계신화(天鷄神話)까지 만들었다. 암탉이 울면 세상이 망한다(牝鷄司晨)는 사상은 단순하게 ‘수컷은 암컷보다 우수하다(雄尊牝卑)’에 그치지 않고, 유교사상으로 흘러 들어가서 ‘남존여비’와 식치(食治) 혹은 약선(藥膳)에서 웅계탕(雄鷄湯)맹신까지 낳았다.

가장 먼저 닭은 신성한 오묘제(五廟祭)의 제물로 웅계탕을 올렸으며, 귀족들에는 음복을 통해서 닭고기를 나눠먹었다. 신라왕실에선 621(眞平王43)년 이후에 수차례 당나라에 인삼을 진공했다. 일본에도 교역되었기에 귀족들은 약치(藥治)로 계삼탕(鷄參湯)을 복용했다. 철제 혹은 유기로 무기, 불상 등을 철유전(鐵鍮典)에서 관급했기에 철제 혹은 유기로 된 탕관(湯罐)이 귀족들에게 공급되었다. 계삼탕은 약탕처럼 탕관에 끓여 먹었다. 이런 인습은 1960년대 후반까지 내려와 경북 북부지방에서 약병아리를 약탕관에 다려 먹었다. 그러나 서민들에게는 6세기경 토기와 옹기가 통용되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방수가 되는 옹기는 평민들에게 7세기경에 공급되었다.

당나라 손사막(孫思邈, 581~682)은 650년경에 “사람의 목숨이 천금보다 소중하다.”는 의미에서 식치처방(食治處方)을 소개한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을 저술했다. 이곳에 ‘숫탉탕 조리법(雄鷄湯方)’법과 ‘오골계 숫탉탕 조리법(烏雌鷄湯方)’이 있다. 당시 신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귀족들은 수탉탕을 즐겨 먹었다. 신라방물 인삼만이 아니라 꼬리가 긴 장미계(長尾鷄)를 중국에서는 신라봉황(新羅鳳凰)이라는 별칭까지 나올 정도로 선호했다. 송나라 973년 유한 등이 공동저술한 의학서‘개보본초’와 1061년에 소송이 저술한 ‘도경본초(圖經本草)’에서는 조선반도의 닭이 약효가 가장 좋다(以朝鮮鷄,藥效極善)고 적었다.

따라서 서민들이 탕음식(湯飮食)을 해먹은 시기는 8세기경이다. 서민이 미식과 건강을 위한 식치로 귀한 닭과 인삼을 구해서 계삼탕을 해먹기는 신분상 혹은 경제상으로도 불가능했다. 고려사에서는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에 닭을 잡아먹는 것을 금지(禁屠鷄)시켰다. 1325(忠肅王12)년 ‘닭, 개, 거위, 오리를 길러 손님접대나 제사용으로 마련하거나 우마를 도살하는 자는 처단한다(屠者爛手而死).”는 명을 내렸다. 이로 미뤄 볼 때 이미 서민층에서도 닭고기 등을 식용했다.

고려인삼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알기로는 백두산(장백산맥) 산삼으로 알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구하기 어려운 산삼은 달성 비슬산의 산삼이었다. 얼마나 유명했으면 여말삼은(麗末三隱)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9∼1392)이 자신의 ‘제비슬산승사題毗瑟山僧)’라는 시(詩) “속세 나그네가 말을 몰아 동쪽 길로 가니 / 늙은 중은 작은 정자에 누워 있다. / 구름은 해를 좇아 온종일 희기만 한데. / 산은 예전이나 다름없이 늘 푸르기만 하네. / 솔방울 벗을 삼아 지난 일 까마득했네. / 말 몰아 구경하니 산신령님께 뵐 낯이 없어라. / 바라는 게 있다면 비슬산 골짝이 물 길어다가. / 이곳 산삼과 복령일랑 한 움큼 집어넣어 푹 달여 마셔나 볼까”라고 내심을 적었다.

조선반도의 닭 가운데, 명나라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1596년에 발간한 ‘본초강목)’에서는 조선의 장미계(long-tailed chicken)를 최고품으로 평가했다. 웅계탕을 다시 세분해서 단웅계(丹雄鷄), 백웅계(白雄鷄), 오웅계(烏雄鷄), 흑자계(黑雌鷄), 황자계(黃雌鷄), 오골계(烏骨鷄), 반모계(反毛鷄), 태화노계(泰和老鷄) 등이 약효를 달리했다. 장미계에 대해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도 ‘(조선반도에서는) 꼬리가 가늘고 길이가 5척이 넘는 장미계가 있다.”고 했다. 특히 긴 꼬리 닭은 고기닭으로, 맛으로나 살이 많기로는 모든 닭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장미계는 고기맛보다도 약효가 뛰어났다. 1827년 실학자 서유구(1764~1845)가 쓴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에서는 ‘(장미계는) 조선반도의 닭의 일종으로 그 꼬리가 길며, 길이는 3~4척이나 되었다(朝鮮一種 長尾鷄 尾長三四).”고 적었다.

프랑스의 탐험가 샤를 바랏(Charles Varat, 1842~1893)이 1888년부터 1889년 1년간 조선을 여행해서 쓴 ‘조선기행(Voyage en Coree)’에 장미계를 목격하고 “조선의 긴 꼬리 닭은 꼬리가 1m는 넘는다(Les poulets longue queue de Joseon ont une queue de plus de 1m).”고 썼다.

장미계는 2012년 국제적 유전자원보유권의 논쟁을 대비해, 권리주장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FAO, DAD-IS(Domestic Animal Diversity Information System)에 등록했다. 2018년 1월 27일자 코리아타임즈 로버트 네프(Robert Neff)의 기고문엔 1938년도에 찍은 사진과 “꼬리 길이가 12~15피트, 1000년부터 1600년경까지 한반도에 날아와서 서식했다. 이를 조선왕실에선 국왕의 상징으로 궁정에서 사육했다. 일제가 식민지시기에 갖고 가서 오사카천년기념물로 등록 관리하고 있다.”고 적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삼계탕

2021년 3월 아내와 영화구경을 하고자 대구시 도심에 들어섰는데 몸살기운이 있어 ‘유대인 페니실린(Jewish penicillin)’이라는 인삼닭죽(蔘鷄粥)을 한 그릇 했다. 닭죽을 먹으면서 머릿속에선 1987년 8월 28일 동아일보 동아제약의 비오자임(Biozyme) 광고문에서 ‘삼계탕이 아니고 계삼탕입니다.’라는 내용이 스쳐갔다. 기억되는 주요 내용은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誌),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에서 삼계탕(蔘鷄湯)이 아니고 계삼탕(鷄蔘湯)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6·25전쟁 이후 계삼탕에서 삼계탕으로 대중화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구글(google) 검색사이트를 이용하거나 도서열람을 통해서도 경도잡지, 열양세기, 동국세시기 등에서 계삼탕(鷄蔘湯)을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다. 삼복날 절후음식으로 개장국(狗醬)과 팥죽(小豆粥)에 대한 이야기만 나온다. 천계신화를 갖고 있었던 신라인 후손답게 닭을 앞세우고 삼을 뒤세워 계삼탕이란 말이 합당하다. 1960년대 인삼의 내수판촉(內需販促) 전략으로 삼계탕으로 정했다.

한편 서지학적 측면에서 요리도서를 중심으로 계삼탕 혹은 삼계탕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면, 경상도지역 향토요리서로는 1670년(현종11)년에 발간한 정부인 안동장씨(貞夫人 安東 張氏)의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 있다. 닭고기 요리로 i) 탕(국)에서는 계란탕, ii) 편육숙편에서는 별미 닭대구편(鷄大口片), iii) 구이에서 닭구이가 소개되고 있다. iv) 침채(沈菜, 김치)에서는 꿩침채가 있는데 여기서 꿩 대신 닭을 권장하고 있다.‘꿩 대신 닭(家鷄野雉)’이 사용되는 음식은 기관지(감기 등)질환 치유음식(healing food), 설날떡국 꾸미(모명), 제사음식이다.

1917년 요리가였던 방신영(方信榮, 1890∼1977)이 저술한 ‘조선요리제법(萬家必備 :朝鮮料理製法)’은 구전 음식제조법을 체계적이고 계량화해 과학요리제법을 제시했다. 그 저서는 2017년 5월 29일 국가등록문화제 686호로 지정되었다. 이 책에서는 닭죽과 영계백숙이 적혀있었다. 또한 백숙에 인삼을 가미하면 보양에 좋다고 소개했다. 1924년 팔방미남이었던 위관(韋觀) 이용기(韋觀 李用基, 1870~1933)가 출판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이 있다. 그는 1936년엔 서양요리와 일본요리 보충증보판을, 1943년까지 증보4판을 내놓았다. 요리법은 서유구의 ‘임원십육지(鼎俎志)’를 번역, 방신영 교수가 서문을 썼으며, 식재료에 꿩과 달걀을 소개하고, 닭국(白熟)을 언급했다. 특히 닭김치에 대해 궁중요리에서 ‘생치과전지(生雉瓜煎脂)’라고 해 오이지에 꿩고기 삶은 것을 같이 먹도록 했다.

방신영(方信榮) 교수의 1942년도판 ‘조선요리제법’에서는 닭죽을 백숙으로 바꿔 표현하고 있다. 1943년도판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도 닭죽(鷄湯)이라는 표현을 했다. 민속음식학자이신 주영하(1962년생) 교수의 칼럼 ‘주영하 음식100년(7)’에서 1948년 7월 3일자 ‘만나관(천일관)’에서는 영계백숙전문점을, 1953년 6월 16일 ‘구(舊)고려정(高麗庭)’에선 영계백숙과 백숙백반을 광고를 정리했다.

글·그림 =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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