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첫눈
[달구벌아침] 첫눈
  • 승인 2022.03.06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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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겨울이 되면 기다리는 것이 있다. 눈이 언제 내릴까 기다리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눈을 보기가 어렵다. 일년에 한 두 번 쌓이지 않는 눈이 내리는 것이 고작이고, 그것마저도 최근에는 보기가 어렵다. 물론 눈이 내려서 좋은 것보다는 불편한 것이 많다. 걷기도 힘들고, 운전에도 위험요소가 된다. 눈이 내리는 잠시만 환호성을 지르고 행복할 뿐 불편함이 많다. 그럼에도 겨울이 되면 눈이 언제올까 기다리는 것은 나만일까?

몇 년 전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직장에 있을 동안 내렸다. 일을 하다말고, 창밖을 보기 위해, 눈이 내리고 쌓이는 것을 보기 위해 창가에 붙어 있었다. 다른 동료들도 얼굴에 함박웃음을 띄고 옹기종기 붙어서 잠시라도 행복한 기운을 받았다. 집에서 커튼을 내리고 있을 식구들이 눈을 보지 못할까봐, 일하는 배우자, 자녀가 일에 파묻혀 창밖을 볼 시간이 없어 놓칠까봐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커피도 한 잔 마시면서 여유있는 시간을 보냈다. 몇 분후에는 물론 일에 전념하느라 눈 오는 것도 잊었다. 퇴근길에는 눈이 쌓여서 걸을 때 폭폭 발이 빠졌다. 자주 있는 상황이면 불편했겠지만 퇴근하는 사람들도 평소와 다른 이벤트에 즐거운 모습이었다.

눈은 도심 도로 중앙 가로수 위에 쌍였다. 세모꼴로 층층이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생긴 나무라서 예뻤다. 일상을 멋진 풍경으로 만들어주고, 깊은 산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나무가 저렇게 크게 우뚝 서 있었는지 몰랐는데 참으로 장엄하게 서 있었다. 눈이 쌍였을 뿐인데 말이다. 눈의 위력이 컷다.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나무를 존재감이 있게 만들어 주었다.

더 오래 전, 20대 겨울에 등산을 한 적이 있다. 강원도 청옥산이었다. 그 시절에 등산이 유행이었고, 직장에서 극기훈련, 단합대회 명목으로 등산을 자주 했었다. 그 날도 그런 이유로 겨울산을 올랐다. 거기서 정말로 아름다운, 첫 경험을 했다. 청옥산에 눈이 내려 쌓여있었다. 눈내린 겨울산이 처음이었다. 발이 푹푹 빠졌지만 힘이 들지는 않았다. 가이드를 따라 직원들이 줄줄이 따라갔기 때문에 위험하지도 않았다. 눈이 햇빛에 반짝였다. 손으로 잡으면 뭉쳐지지는 않고,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 나갔다. 조금 더 올라가니 경사진 곳에 나무가 즐비했는데, 경사진 곳에 한참을 서 있었다. 한 다리는 올리고, 한 다리는 세우고, 걷다가 멈춘 상태로 숨마저 멈추었다. 눈이 나무에 쌓여 얼어붙어 있었다. 나무에 쌓인 눈이 너무 아름다웠다. 꽃이 핀 것 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것이 바로 눈꽃이었다. 마치 현실세계와는 다른 눈꽃왕국에 와 있는 기분이었고, 그 왕국의 공주 같았다. 영화 '겨울왕국'에 나오는 장면같았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고, 오래도록 그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눈으로 간직하고, 마음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더 어릴 때 눈 내리는 날의 기억이 있다. 초등학생 때일 것이다. 겨울에 눈이 평펑 내렸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 앞 못에 눈이 내리자 물에 사르르 녹아 물이 되었다. 쌓이지 않는 눈이 아까워 못둑으로 나갔다. 못둑 아래로 길이 나 있고, 논이 층층이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양 쪽에는 언덕 같은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아래로 쭉 내려가면 신작로가 있었고, 다시 논, 그리고 강이 있었다. 그 너머로는 하늘이 였다. 못둑 느티나무 아래에 혼자 서 있었다. 하늘에서부터 아래로 펼쳐진 논 위로 눈이 내렸다. 논이 서 있는 땅보다 더 낮았기에 하늘과 논 사이에는 공간이 컸다. 그 공간속을 온통 흰 눈이 메웠다. 하얗게, 비처럼 내렸다. 마을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오가는 사람이 없었고,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간에 눈과 자기자신만 있는 것 같았다. 우주에 혼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외롭지 않았다. 가슴에서 뭔가 벅찬 감정이 쑥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몸밖으로 튀어나오지는 못하고, 입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그 때의 그 감정.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온 몸이 마비되고, 움직여지지도 생각해지지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정지된 장면이 떠오른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굳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황홀감'일까?

이후로 눈을 기다렸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하루종일 심장이 나대었다. 그 황홀감이 아직 몸 속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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