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개인전 “미술은 내 생각 100%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 좋아”
조영남 개인전 “미술은 내 생각 100%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 좋아”
  • 황인옥
  • 승인 2022.11.30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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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동원 앞산점·대백갤러리 동시 전시
근대화단 이끈 대구 전시 ‘긴장’
‘代作’ 재판 기간 그림에만 전념
이번 전시서 ‘화가’ 재탄생 기대
‘무혐의’가 진짜 화가로 바꿔줘
앤디 워홀 작품서 아이디어 얻어
유화 풍경서 ‘화투’로 물꼬 틀어
조영남자신의작품앞
조영남이 갤러리동원에 걸린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황인옥 기자

 

“음악은 엄격한 규칙과 법칙이 있지만 미술은 무한히 자유롭다. 나의 생각을 100% 표현할 수 있어, 사람들에게 내가 무얼 생각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가수 조영남보다 화가 조영남일 때 더 행복한 이유는 ‘자유’에 있다. 음악은 누군가의 창작물을 창작자의 의도에 부합하도록 표현하는 것을 최고의 과제로 삼지만, 미술은 스스로 창작자가 되어 거침이 없이 표현하면 된다. 그가 지난 50여 년 간 붓을 든 이유는 창작이 주는 자유로움에 있다. “내 생에서 연애 다음으로 재미있는 것이 그림이야. 가수는 생업이라 즐길 수가 없지만, 미술은 내가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아닌 거다. 그래서 그림이 노래보다 더 재미있어.”

화가로 돌아온 조영남 개인전이 갤러리동원 앞산점과 대백프라자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전시에는 화투, 바둑, 음표, 근·현대 명화 패러디, 소쿠리와 노끈을 활용한 콜라주 등의 다채로운 화풍들을 걸었다. 여기에 그가 집필한 ‘시인 이상과 5명의 아해들’(2020),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2020) 등의 책도 함께 소개된다.

지난 28일 전시 개막일에 만난 그에게서 긴장감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그는 먼저 “한국현대미술의 강력한 견인차 역할을 했던 대구에서 전시하게 되어 떨리지만 늘 전시하고 싶은 곳이었다”는 소감을 전했다. 대구는 1970년대 대구출신의 젊은 작가들이 기성미술계의 경직성에 도전하며 다양한 미술 실험을 펼치며 한국현대미술의 견인차 역할을 한 지역이자, 한국 근대 화단을 이끈 이인성과 이쾌대를 배출한 한국 근대미술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조영남은 대구 근·현대미술의 역사성에 “대구에서의 개인전에 긴장감이 앞선다”는 말로 경의를 표했다.

조영남작-세한도와극동에서온꽃
조영남 작 ‘세한도와 극동에서 온 꽃, 극동에서 온 꽃’

이번 전시는 화가 조영남의 화려한 귀환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그림 대작(代作) 사기 혐의로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기나긴 공방 끝에 2020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았다. 무죄 판결 이후 첫 대규모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 언론의 관심이 쏠리고 있고, 그는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외부 활동을 일체 중단했다. 유배 아닌 유배였고, 그는 이 기간 오히려 창작활동의 적기라 여겼다.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시인 이상과 5명의 아해들’(2020),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2020), ‘예스터데이’(2022) 등의 저서도 집필했다. “재판하는 5년간 유배생활이 되다 보니 유배를 당하셨던 정약용 선생이나 김정희 선생이 떠올랐어. 그분들이 유배지에서 글과 그림에 전념했듯이 나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열심히 했지.”

그는 스스로를 ‘화수(畵手)’ 라고 칭했다. 가수면서 화가라는 의미였다. 그림을 그린 지 50년이 되었고, 화투를 활용한 한국적 팝아트로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하며 미술 활동을 활발하게 했지만, 그의 작품에는 연예인이 그린 그림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진지하게 작업하는 화가 조영남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했다.

“‘이 친구가 건성건성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진정으로 그리는구나’라는 정도로 생각해 주셨으면 너무 고맙겠어요.”

그의 미술적 재능은 음악적 탁월함 못지 않았다. 유년시절부터 그림을 그렸고, 고등학교에서는 미술부장을 맡을 정도로 일찍부터 미술과 친숙했다. 하지만 대학 입시를 앞두고 음악과 미술을 저울질하다 결국 음악으로 진로를 틀었다. “미술은 물감이나 캔버스같은 재료가 있어야 하지만 음악은 목소리만 있으면 됐다”는 것이 음악을 선택한 이유였다. 미술을 전공하기에는 경제적인 여건이 미치지 못했던 것.

음악대학 진학 이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일깨운 이는 친구였던 가수 김민기였다. 군복무 중 나온 휴가에서 김민기와 함께 서울대 미대에 갔다 미대생들의 그림을 보고 자신감을 얻어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 미국 체류 기간에 창작활동을 본격화했고, 1973년에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국내는 물론이고, 베이징, 뉴욕, LA 등에서도 전시를 이어가며 화가의 경력을 차곡차곡 쌓았다.

그의 성정처럼 화풍의 변화 역시 자유로웠다. 작업 초기에 시골 풍경이나 청계천 풍경을 유화로 그렸지만, 그의 전매특허인 화투 그림으로 물꼬를 틀었다. 미국 체류 기간 때의 획기적인 변화였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들을 다녔는데 세상의 모든 그림은 거기에 다 있었어. 당시 내가 한 생각은 더 이상 무얼 그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어.”

그때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앤디 워홀의 팝아트인 코카콜라병 그림이었다. 그는 “이거다”라며 쾌재를 불렀다. 앤디 워홀은 모든 이에게 동일한 가격과 품질로 판매된다는 지점에서 코카콜라를 미국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의 가치와 연결 지었다.

붉은색서울대교복차림의빗속에서우산을들고서있는남자
조영남 작 ‘붉은색 서울대교복차림의 빗속에서 우산을 들고 서있는 남자’

앤디 워홀로부터 형식과 개념에서 힌트는 얻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그릴 것인가?’는 미지수였다. 그때 교포사회에서 일상적인 놀이로 행했던 화투를 보고 눈이 번쩍 띠였다. 미국까지 와서 자영업자, 의사, 회사원, 노인, 젊은 사람 할 것 없이 화투를 즐겨하는 모습을 보고 ‘바로 이것’이라고 외쳤다. 앤디 워홀이 ‘콜라병’이라면, 조영남은 ‘화투’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그는 화투를 그리기도 하고, 화투를 캔버스에 콜라주로 붙인 후 그림을 그리기도 하며 화투 그림에 다채로움을 더했다. 화투는 한국적 팝아트의 시작이었고, 30년째 그의 전매특허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화투에서 숫자에 주목하는데 나는 화투에서 그림을 보았어. 일본으로부터 왔지만 이제는 우리가 가장 즐겨하는 오락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모순적인 상황도 보였어. 그때부터 주야장창 화투만 그렸지. 화투에 대한 새로운 자리매김이 시작된 것이지.”

그의 작업은 화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바둑, 트럼프, 체스, 태극기, 소쿠리 콜라주 등 다양한 소재들로 확장됐다. 모두 일상에서 만난 소재들이며 번뜩이는 그의 아이디어로 예술의 경지로 승화됐다. 이처럼 창작의 영감은 주로 일상에서 얻었다. 이번 전시에 걸린 신작 ‘노인과 에펠탑’은 일상이 주는 영감으로 작업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출발은 한 여사친이 오랜만에 본 그를 “늙어 볼품 없어졌다”라고 평한 것이다. 늙어 볼품없는 자신의 모습과 세련되고 튼튼한 에펠탑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베르나르 뷔페가 그린 에펠탑을 패러디했다. 근·현대 명화 패러디는 그의 화풍 중 하나다.

“사람들에게 내가 무얼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기 때문에 일상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작업의 소재가 되는 것은 당연했어.”

화가 조영남의 작가정신에서 동서고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발견한다. 소재나 재료에서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이런 자유분방함은 그가 미술에서 얻는 가치다. 하지만 작업의 뿌리 하나는 일관되게 가져간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 시나 제목, 사인까지 작품의 일부로 수용하는데, 문자에 대한 선호는 전통문인화로부터 출발했다.

“나는 문인화를 이어받아 문인화를 그린다고 결정했어. 그래서 시(詩)도 넣고, 제목도 넣고, 낙관까지 적어.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지만 나의 정체성은 올곧게 가져가는 거지.”

가수로 최고의 명성을 얻었고, 화가로도 주목을 받았지만 대작 사건으로 그의 성취는 한 순간에 백척간두에 섰다. 재판 기간 동안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고, 재판 전에 판매 된 작품 20점 중 15점이 환불 요청되어 “집 빼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할 만큼 금전적인 손실도 컸다. 그의 표현대로 “쫄딱 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림의 주가를 올려놓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드러났다. 무혐의 판결을 받은 후 그림 가격이 2~3배나 올라 호당 70만원을 호가한 것. 100호 작품이 7000만원에 판매될 정도면 이제는 취미 수준을 넘어섰다. 대작 사건이 오히려 미술을 사랑하며 취미로 그리는 가수라는 이미지를 진짜 화가로 바꿔준, 제대로 판을 뒤집는 계기가 된 셈이다.

그는 “늘그막에 운이 좋다”고 했다. “평생 국민가수로 명성을 날렸지만 나이 들어서 그림을 그리며 먹고 살 수 있게 됐고, 자유로운 창작활동도 할 수 있으니 오히려 운이 좋은 것이지.”

가수 겸 화가, 문필가로 활동해온 조영남의 예술 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인 ‘조영남은 외계인이다’전은 대백프라자 10층 특별전시장에서 4일까지, 갤러리동원 앞산점에서 15일까지 진행된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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