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1444년 지은 누각 ‘금학루’의 ‘琴’에서 영향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1444년 지은 누각 ‘금학루’의 ‘琴’에서 영향
  • 김종현
  • 승인 2023.04.1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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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금호(강)의 옛 이름을 찾아서
대구군사 금유, 姓에서 ‘거문고 금’ 발견…선조 혈맥 잇고자 누각 이름에 ‘琴’ 사용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 ‘금호’ 출현…이후 경상도지리지·대구부읍지 등 실려
낙동강 유역·금호강과 합류하는 지역 금호, ‘하빈현’·‘사빈’으로 불리기도
신라어로 바꾸면 ‘아시 미르’…오늘날 대구 읍내동 ‘아시골’서 흔적 엿보여
달구벌아침신시
달구벌아침 신시. 조선시대 금호는 오늘날 하빈면과 북구 사수동이다. 그림 이대영

◇금유의 성씨가 ‘거문고(琴)’에서 연유

지구촌에서 가장 많은 성씨를 가진 나라는 일본이다. 대부분이 장소에 연유하고 있다. 최대 성씨는 사토씨이고, 2013년 인구조사발표에서 193만 명으로 집계됐다. 일본성씨대사전에 의하면, 30~ 40만의 성씨가 있다. 이렇게 많은 건 같은 한자의 성씨라도 독법에 따라 표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은 야마시타(山下), 밭 한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다나카(田中) 등으로 파생되고 유래되었다. 2020년 인구조사에서 ‘대구(大丘, だいく)’라는 성씨를 가진 일본인이 70명으로 북해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조선 세종 때 대구군 지군사(大丘郡 知郡事)로 임명받았던 금유(琴柔, 생몰연도 미상, 재직기간 1396 ~ 1446)는 자신의 성씨가 ‘거문고(琴)’에서 연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삼황오제의 복희씨가 창제했던 ‘고금’에 관련된 직업에 선조들이 종사했다는 피를 속이지 못했다. 금호강에 선조의 혈맥이 흐르게끔 금학루의 명칭을 두고 많은 고심을 했다. 금씨는 위국(衛國)에 연원을 두고, 주나라 경왕(BC 544 ~ BC 520) 때 ‘공자가어’, 혹은 ‘맹자’에도 나오는 금뢰(琴牢)의 후예로 금응(琴應)이 기자(箕子)와 함께 한반도에 들어왔기에 성씨의 기원이 된 ‘거문고(玄鶴琴)’와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동이족의 선비라면 적어도 유행(儒行)에선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라는 육예(六藝)에서 관련성이 깊었다. 특히 영남유림의 선비풍류와 연계되어 선유문화(船遊文化) 혹은 강안문학(江岸文學)을 태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민요에서 (논을) 메나리(農謠) 혹은 어기어차(船遊)라는 후렴구에 따라 경쾌하고 빠른 곡조인 속칭 현대식으로말하면 ‘미·솔·라·도·레’ 5음계의 메나리토리 조(農謠調, 혹은 山遊調) 민요를 탄생시켰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거문고의 본향(玄琴本鄕)’이 되어야 할 달구벌에서 판소리 명창이 많이 배출되었다. 1920년부터 1930년대까지는 권번(券番, 대구권번, 달성권번 등) 출신들이 판소리계에 주름을 잡았다. 강소춘(姜笑春, 1896 ~ 몰년미상), 김추월(金秋月, 1897~ 1993), 박소춘(생몰년도 미상, 1933~1935 활약), 김초향(金楚香, 1900 ~ 1983), 박록주(朴綠珠, 1909~ 1979) 그리고 최근 남원 출신 주운숙(1953년생) 명창이 대구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천운이다.

특히 1936년 최계란(崔桂蘭, 1920-2001) 명창이 불렀던 대구 아리랑은 자진모리로 되어있다. 전주-간주-후주를 포함해 8분음 10박자 엇모리장단이 특이하다. 최계란은 오늘날 동구 봉무동 출신으로 1930년 10살 때 달성권번(염매시장에 소재)에 들어가 강태홍(姜太弘, 1893-1957)의 지도를 받았다. “관산만리 구름 속에 저 달이 숨어, 금호강 여물에 눈물지네.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리야. 아이롱 고개로 넘어가네.”라는 구절에 당시 서민들은 애간장을 녹였다. 천만다행으로 ‘제6회 최계란 선생 대구 아리랑 축제’가 2019년 9월 30일 봉무공원에서 열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금호

오늘날 금호강이라고 명칭을 갖게 된 건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가 발간된 1454년 이후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금호(琴湖)의 기원은 영천 자모산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려 대구군 북을 지나 서쪽 낙동강으로 유입된다”로 기록되었다.

금호강은 금학루라는 누각으로 인하여 거문고와 관련되어 해석하게 되었다. 이곳엔 1408년 옥고와 1425년에 금유라는 두 분의 명현이 선정을 베풀었다. 1444년에 금학루 누각을 세워 금도유맥(琴道維脈) 유행풍류(儒行風流)의 터전으로 잡아놓았다. 이를 통해 금호강(琴湖江)으로 이름을 바로 찾았(正名)다. 사실은 1425(세종7)년 세종대왕은 ‘신찬팔도지리지’편찬을 하명하면서 동시에 각도에서도 도지(道誌)를 작성해 올려 그를 기반으로 작성하도록 했다. 경상도관찰사 하연(河演,1376~1453)은 이를 대구군사(大丘郡事) 금유와 인동 현감 김빈 등에게 전달해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를 편찬하도록 했다.

따라서 경상도지리지(1425), 세종실록지리지(1454), 동국여지승람(1462) 및 신증동국여지승람(1481)에서도 금호 강명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1481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금호는 대구도호부에서 십일 리 정도 떨어진 북쪽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 원류는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영천 보현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자산이다. 금호는 서쪽으로 흘러 사문진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고 기술했다. 1899년에 편찬된 대구부읍지에선 “금호강은 북쪽으로 십리 정도에 있으며, 그 원류는 두 군데인데, 하나는 신령 보현산에서 흐르고, 다른 하나는 경주 모자산에서 흘러내려 영천에서 한 줄기가 되어 이를 금계(琴溪)라고 했다. 이는 서쪽으로 낙동강에 들어간다.”

물론 금호란 1995년 이전 달성군 하빈면에 소속되었으나,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고 금호강과 합류하는 곳이라서 하빈현(河濱縣) 혹은 사빈(泗濱 : 泗水河濱)이라고도 했다. 이때 금호라는 별호도 가졌다. 인근 금천역이 강변에 있었기에 풍수지리상 비보(裨補)하는 명칭이었다. 1601년 3월 다사 선사사 앞에서 23인의 대구·경북 선비들이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이벤트를 추진했다. 조선시대 금호는 오늘날 하빈면(오늘날 하빈과 다사)과 대구북구 사수동을 통칭하던 별칭이었다.

금호강 수변엔 1784년을 전후해 경산 하양(부호리 114) 금호서원이 건립되기도 했다. 정조4(1790)년에 금호서원이란 사액이 내려와 서원에 걸었다. 1984년 경상북도교육연구원 등에서 편찬한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에서 금호강의 유래를 ‘바람이 불면 강변의 갈대밭에서 비파(琴)소리가 나고 호수처럼 물이 말고 잔잔하다.’하여 금호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라개국에 있어 일체 무력사용 없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한마음 한뜻을 집결하고자 영산 팔공산과 거대한 천경호(天鏡湖, 일명 琴湖)가 만나는 달구벌에 박혁거세는 아침 신시를 열었다. 율포(栗浦)에 바다 저잣거리(海市)를 열어 교역을 마련했다. 이런 내용이 ‘부도지(符都誌)’에 적혀 있다. 이에 연유하여 오늘날의 금호는 신라어 ‘아사 미르(朝市湖, asa miz)’ 혹은 ‘아시 미르(鳳凰湖)’라고 했다. 달구벌을 휘감아 흐르는 금호를 ‘봉황이 서쪽(天穀庫咸池)을 향해 날아오름’으로 표현했다.

금호강변에 신라어 ‘아시(阿尸 : 鳳凰) ’에 해당하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북구 읍내동의 ‘아시골’ 혹은 ‘아시랑고개(阿尸良峙)’를 비롯해 뒷산을 ‘명봉산(鳴鳳山)’, 명봉산 기슭에 ‘봉서재(鳳棲齋)’가 있었다. 그리고 1819년 칠곡도호부가 가산산성에서 평지읍치(平地邑治)를 하면서 관아(제오헌)의 북편누각을 ‘봉서루(鳳棲樓)’라고 했다. 인근 동명면 봉암동(鳳巖洞)이라는 지명도 있다.

좀 더 확대하면 동화사(桐樺寺)의 봉서류(鳳棲樓, 嶺南緇營衙門) 혹은 봉황문(鳳凰門)까지도 연관할 수 있다. 신라어 ‘아시(阿尸, 鳳凰)’는 고구려어 ‘안시(安市)’로, 요동(遼東)의 안시성(鳳凰城)이 대표적인 사례다. 삼국사기에서도 아시랑국(阿尸良國, 함안), 아시랑가야(阿尸良伽倻)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아시(asi)는 고려시대 땐 수사(數詞)로 ‘첫 번째’라는 의미변천을 했다. 실례를 들면 ‘아시 빨래(초벌 빨래)’, ‘아시 그루(일모작)’ 혹은 ‘아시 매기(초벌 논매기)’등이 지금까지도 대구와 경북에서 사용되고 있다.
 

 
글 = 권택성<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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