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순행과 역행 사이
[달구벌아침] 순행과 역행 사이
  • 승인 2023.04.2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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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물가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만 보고 오르던 담쟁이를 끌어 내렸다, 아랫집 언니가. 그에 비해 나는 생각이 달랐다. 창문을 가려 방안을 어둠에 잠기게 해 신경은 쓰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창이 많은 내 방에 그늘이 되어주기도 하고 밋밋한 창에 풍경을 더해주어 좋았다. 바닥을 치고 오르는 담쟁이의 끈기와 열정을 오히려 부러워하던 참이었다. 언니에게 물었다.
"벽을 타고 오르던 담쟁이를 왜 모조리 다도 아니고 반만 끌어내렸어요?"
멈칫, 한숨 고르듯 미소 띤 표정을 가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갈 길, 그냥 묵묵히 가면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담장을 넘어 지붕의 영역까지 파고 들어가 세력을 넓히는 게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 것만 같아…."
듣고 보니 집주인인 언니는 그럴 수도 있으리라 고개가 끄덕여졌다. 주인으로 사는 것과 객으로 사는 사람 사이에 놓인 시점이 달랐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내일이다.' 했다. 눈만 뜨면 무제한의 하루가 주어지지만, 반도제대로 쓰지 못하고 보내기 일쑤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고 삐거덕거린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고독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듯, 고개와 고비를 반복하며 시간의 가위에 눌려 손 놓고 바라만 봐야 하는 일들이 잦다. 무엇을 비우고 어떤 것들로 채우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것마저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강물처럼 위로 흐르던 담쟁이가 역류하듯 아래로 흐른다. 뿌리째 뽑히지 않고 남아 있는 뿌리를 향해 거세게 치닫는다. 여기서 끝낼 수 없다는 듯 점점 더 세력을 넓혀간다. 연두에 연두를 덧대어 가며 진초록으로 푸르러져 간다. 메아리처럼 되돌아온 담쟁이의 모습 위에 내가 매달려 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거나 마음이 복잡한 날이면 가끔 나는 기차를 탄다. 달려가던 길, 잠시 잠깐 멈춰 선 역처럼 생각은 이어지거나 끊어지기도 하지만 걸어온 길과 나아갈 길, 사이에 놓인 시간의 흐름을 떠올려 본다. 내 생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는지 또한 아팠던 날은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곤 한다. 그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일들을 지금이라도 알아내어 되도록 같은 실수나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오늘보단 내일이 더욱더 나을 거라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릴 데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가면, 모퉁이 하나만 더 돌면 좀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 던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그 희망에 이끌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 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 /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
이기철 시인의 시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부분이다. 청춘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작아지고, 뒤처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오래될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때가 많았다. 경험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귀중한 나만의 자산이 된다.
주인으로 살든 객으로 살든 나이와 상관없이 늘 새로운 이야기로 채워지곤 하는 게 인생이 아닐까. 다 그만두고 싶었던 하루,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싶은 하루, 그 수많은 날의 하루하루가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 역방향이든 순방향이든 살아 있는 한 꿈을 이룰 수 있다면 좋겠다. 제 갈 길 가더라도 남에게 상처 주지 말고 피해 가는 일은 피하며 살 일이다.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던 생'이라는 대목에서 위로라도 받은 듯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시인의 말처럼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물한 번 미워한다고 해도 우리의 하루는 누구에게나 귀하고 빛나며 소중하지 않았던 날은 없었던 것 같다. '서른 번 미워하고 단 한 번 사랑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날이 살아있으니 받을 수 있는 눈부신 선물이었음을.
'조금 더 뒤에 굉장한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다독이며 꽃 지는 사월, 지금까지 우릴 붙잡고 온 희망에 기대 새날을 향해서 성큼 발을 내디뎌 본다. '시간 밖에서 우리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던 법정 스님의 책 '오두막 편지' 중 한 구절을 끌어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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