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기댄다는 것
[달구벌아침] 기댄다는 것
  • 승인 2023.05.2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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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옥상에 간이 텃밭을 만들었다. 그곳에는 호박이며 고추, 가지와 방울토마토 그리고 상추를 심었다. 시멘트 바닥뿐이었던 삭막한 공간은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정원이 되었다. 시시때때로 옥상을 오르내리며 수돗물을 주기도 하고 큰 대야를 마련해 빗물 저금통을 만들어 두었다.
빨래를 널어 말리기 위해 일부러 옥상에 들를 때마다 채소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고 앉아 그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를 엿듣곤 한다. 그럴 때면 젖은 빨래가 마르듯 속상하거나 우울한 마음이 뽀송뽀송해진다. 우연히 책장 정리를 하다가 책갈피 속 들앉은 네 잎 클로버를 필연처럼 만난 듯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싹을 틔운 후 얼마쯤 지난 채소들은 홀로 일어서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차간거리처럼 그들도 거리를 두어 솎아주기를 한 후 바로 설 수 있도록 지지대를 만들어 주었다. 휘거나 꺾이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일일이 받쳐 주었다. 호박넝쿨이 비닐하우스 걷히고 남은 지지대에 기대어 있다. 고추는 누군가가 두고 간 지팡이에 기대고 가지는 폐허에서 건져 온 철근에 기대 있다. 방울토마토는 집을 집답게 만들어 주던 텐트팩이 부여잡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한 생을 엮어가고 있다.
비가 오려나 보다. 봄이 여름에 기대어 재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지나가고 있다. 무리 지어 하늘을 떠가는 구름이 노란 양은 냄비 속에서 몽글몽글 끓어오르는 수제비 같다. 수제비 같은 구름 속에서 누군가가 하얗게 미소를 지으며 손짓한다.
그리움의 보풀이 인다. 비가 잦은 날이면 그리움의 무게도 가장 커진다. 내 그리움에 누군가가 기대온다. 비가 오면 맘과 몸 구석구석이 무겁고 찌뿌둥하다며 뜨끈하고 찐한 멸치육수에 손으로 떼 넣은 수제비를 먹고 싶다던 당신이 생각난다. 감자와 애호박을 듬뿍 썰어 넣은 감자수제비를 가장 좋아했던,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차 멀어진 아버지가.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소란했던 마음이 차분히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세상이 온통 빗소리에 잠긴다. 슬픔이 빗소리에 기대어 그리움을 쏟아낸다.
수제비는 먹을 게 부족하던 시기에 소중한 끼니였다. 먹을거리가 흔해지면서 수제비는 주식이 아니라 간식으로 추억의 먹거리로 자리를 이동했다. 일찍이 계모의 눈칫밥에 익숙했던 아버지에게 있어 수제비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눈칫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던 아버지만의 아린 맛이었을 테다. 쉬이 도려내지 못한 감자 싹처럼.
후드득 빗줄기가 죽비처럼 바닥을 치면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불렀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맏딸인 내게 기대고 싶어 했다. 당신 그리움의 입맛을 어렴풋이나마 흡사하게 알아주는 자식이라 여겼던 탓은 아니었을까?
"큰딸, 아부지 수제비 한 그릇 끓여봐라"
삶이 그러하듯 반죽하나 하는데도 인생의 철학이 엿보였다. 봉지 안에서 물기와 어우러져 숙성되는 동안 큼직한 냄비에 비린내 제거한 멸치와 다시마, 무, 양파 등등 갖가지 채소를 넣어 오랜 시간 뭉근히 육수를 끓인다. 건더기를 건져낸 말간 국물에 분이 풀풀 나는 감자를 뚜걱뚜걱 썰어 넣는다. 감자가 살 푼 익기 시작하면 반죽을 꺼내어 손으로 굴려 가며 살뜰히 치댄다. 행복하게 웃을 때의 입 크기만 하게 반죽을 떼어 햇살이 내려앉듯 사뿐하게 한장 한장 얇게 펴서 물수제비뜨듯 던져 넣는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 끓어 넘칠 수도 있어 끝까지 불 조절에 신경을 써야 정성을 들여야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다. 끝으로 계란지단을 부쳐 만든 흰색과 노란색의 꾸미를 가지런하게 올린 후 아버지 앞에 내어놓는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대접 거뜬히 비운 아버지는 그제야 맛있다는 말 대신
"딸내미, 수제비를 손으로 발로 뗐나?"
고적감이 눈 녹듯 사라지고 위로를 받으신 듯 환하게 웃으셨다. 어쩌면 수제비는 아버지와 나만의 소통의 맛이요, 힘을 돋우는 충전의 맛이었으리라.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고 한다. 음식은 봉인되었던 추억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을 지녔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날, 그리움으로 우려낸 육수에다 한 장 한 장 추억의 수제비를 띄운다. 감자수제비 속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웃비가 걷히니 비탈진 산허리, 개망초 꽃이 흐드러지게 핀 언덕길을 힘차게 달려가는 아버지가 잠시 보였다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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