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물은 모든 만물을 이롭게 하고 낮은 곳에서 머물러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물은 모든 만물을 이롭게 하고 낮은 곳에서 머물러
  • 김종현
  • 승인 2023.06.1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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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미르와 리브
경상도·강원도에 ‘미르’ 지명이 남아
‘미’ 접두어로 미나리·미더덕 등 사용
물을 잘 다루면 인간에 새로움 창조
매일 새로워짐이란 기원 담아 ‘신천’
신천의치수
 

◇신라어 물(水)은 ‘미르(mir)’

신라어로 물(水)에 해당하는 말은 ‘미르(水, mir)’다. 아직도 경상도와 강원도 일부지역에선 ‘미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두물머리(兩水里)에 해당하는 신라어는 ‘미르머리(水頭)’로 지명에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1527년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에서 ‘龍 : 미르 용’이란 해석을 달았다. 그로부터 ‘미르머리(龍頭)’를 한자음 ‘용두(龍頭)’로 표기한 지명만이 100여 개소가 넘는 ‘용두리(龍頭里)’가 생겨났다.

오늘날 ‘미르’란 신라어 그대로 경북에서도 ‘미르나무(水邊木)’, ‘미르터(高水敷地)’ 혹은 미터(물섶, 둔치)’ 혹은 ‘미리내(은하수)’ 등이 남아있다. 또한 변형되어 ‘미’ 접두어로 미나리, 미꾸라지, 미더덕 등이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일본에선 신라어 미르가 ‘미즈(miz)’로 거의 현형 가까이 사용되고 있다. 신라인들은 미르(水)가 꿈틀거리는 모습의 살아있는 용(龍)으로 봤다. 물로 인해서 생겨난 선상지(扇狀地) 혹은 삼각주(三角洲) 등 속칭 ‘비옥한 초승달(肥沃新月, fertile crescent)’이 생겨나는 걸 용이 알을 낳는다고 봤다.

서양에 강물(river)이란 명사(名詞)는 홍수의 범람으로 인간에게 재앙을 안겨준다는 점에 착안하여 영어단어 ‘리브(rive)’는 “찢다. 잡아 뜯어 버리다. 쪼개다...”는 동사(動詞)에서 생겨났다. 따라서 ‘강(江, river)’은 ‘찢어버리는 것(물)’, ‘이간질하는 것(물)’ 혹은 ‘잡아 뜯어 먹는 것(물)’이라는 본성을 알고 이름을 지었다. 이와 같은 속성은 한문 강(江)이란 글자의 생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후한 허신(許愼, 30~124)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촉나라 전저요의 외민산에서 흘러나와 바다로 들어가는 강물(江水)이 ‘꿍~꿍~(工工)’ 소리가 났기에 강(江)”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속뜻은 물의 장인(水之匠人)이다. 즉 한마디로 살아 움직이는 창조체(創造體, creator)로 봤다. 물길이란 대장간의 대장장이처럼 ‘새로운 초승달(新月芽)’을 만든다는 의미다. 이를 연장하면 인류 4대 문명발상지 모두가 하나 같이 큰 강을 끼고 생겨났던 것이 바로 강물의 창신력(創新力)이었다. 강물의 창신력을 ‘법고창신’이란 무위자연의 본질로 봤다.

이와 같은 강물의 법고창신력을 확신했던 선인들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서 “가장 좋은 상태는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데 뛰어나지만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서 머문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잘 다루면 인간에게 새로움을 창조했다. 서양에서 강물의 파괴력을 인식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었듯이 동양에서도 아기 다루듯이 절대로 나쁜 의미의 말을 하지 않고자 했다. ‘말에는 혼령이 있다(言靈觀念).’는 속내를 감추고 강 이름(江名)을 지었다. ‘이무기’를 잠룡(潛龍)이라고 했고, ‘지렁이’에게도 토룡(土龍)이라고까지 불렸다. 강 이름만 아니라 산 이름(山名)에까지도 좋은 이름을 붙여서 이름값을 하도록(好名好實, 名不虛傳) 했다.

◇신천엔 덕업일신과 법고창신의 혼령을 담아

‘사잇강(천)’ 혹은 ‘샛천(강)’의 뜻을 몰라서 신천이라고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다. 간천(間川)이라고 지었다면, 손자병법 등에서 언급했던 간자(間者), 이간(離間) 혹은 용간(用間)의 역할을 강(江)이 한다면 예측불허의 자연재해를 누가 감당하겠나 하는 깊은 고민에서 기원을 담아서 ‘신천(新川)’이라고 했다.

“매일 새로운 덕업을 창조하여 이를 세계만방에 펼쳐나가자(德業日新, 網羅四方)”를 국명으로 출발했던 ‘신라(新羅: To Development Newness)’였다. 지구촌에 이렇게 참신한 ‘새롭게 펼치자(新羅)’는 국명(國名)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이다. 바로 여기에 신라 선인들이 신천이라고 불렀던 속내가 있다. 덕업으로 매일 새로워짐이란 기원을 강 이름(新川)에 담았다. 중국 은나라 탕왕이 목욕탕(혹은 세숫대야)에 “진실로 나날이 새로워지고, 하루하루 새로워지도록 하고, 날로 새롭게 하자”는 각오를 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창신혼령이 달구벌에 흐르게 한 것이다.

1787년과 1792년 과거시험지나 상소문에 박지원 등의 문사들은 속칭 ‘패관소품체(稗官小品體)’라는 문체를 사용해서 문서작업을 했다. 이에 정조는 그런 문체를 사용하는 신하들을 처벌(파직)했다. 문체반정사건(文體反正事件)으로 정조의 개혁정치 전체를 문체반정으로 격하시켰다. 당시 영남유림에서도 문체반정의 풍조는 비켜 가지 않았고, 엉뚱하게도 신천 강명에 불똥이 떨어져 갑론을박을 시작했다. i) 신라의 ‘덕업일신’을 다시 되짚어 봤고, ii) 박지원의 ‘법고창신’의 철학을 강명에 의미부여했다.

위의 신천논쟁을 잠재운 자장가는 바로 법고창신이었다. 여기서 연암 박지원의 ‘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언급한 “옛 걸 본받는 건(法古), 옛 자취에 빠져 헤매는 병(病泥跡)이 될 수 있다. 새 걸 창조한다는 게(創新) 법도에 어긋날 우려(患不經)가 있다. 진실로 능히, 옛 걸 본받으면서도 변화를 알고(法古而知變), 새 걸 창조하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 있다면(創新而能典) 지금의 문화 또한 옛글과 같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들어 재고케 했다.

잠자던 신천간천논쟁의 불씨가 되살아나기는 창씨개명 때였다. 일제강점기 1912년 타이쇼(大正, たいしょう) 천황(재위, 1912~1926)이 즉위하자, 그해 매일신보 9월 12일자에 일본과 조선의 동일화(日朝の同化)를 위해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인과 같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36년 8월 5일 제7대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미나미 지로(南次郞, 재위 1936.8.5~1942.5.29)가 부임해 일조동조동근론(日朝同祖同根論) 혹은 황국신민론을 정책으로 옮겼다.

즉 1937년부터 1941년까지 5개년계획으로 조선인의 일본국민화 정책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경성신문 1940년 1월 30일자에 ‘창씨성제(創氏姓制) 곧 실시, 신생활의 기쁨을 전선(全鮮)에 골고루’란 제명의 조선인의 글을 신호탄으로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민사령 개정 중 창씨창성(創氏創姓)에 관한 개정안을 의결해 발표했다.

당시 조선인에게 민족작가로 존경을 받았던 이광수(李光洙, 가야마 미쓰로, 香山光郞)는 “2천600년 전 신무천황께서 즉위하신 곳이 구원(軀原)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향구산(香久山)입니다. 뜻깊은 이 산 이름을 성씨로 삼아 ‘향산(香山)’으로 한 것인데...”라고 창씨개명에 찬양의 글을 올렸다.

그런데 이때 대구는 ‘신천(新川,しんかわ)’과 ‘간천(間川,まがわ)’이라는 강명이 이광수의 향산처럼 조선지식층의 창씨대상 산천으로 언급되었다. 일본(황국)민의 성씨 가운데 ‘마가와(間川)’ 또한 ‘신가와(新川)’가 있었기에 강명을 고쳐야 한다였다. 앞으로 조선신민도 창씨 개명하여 일본 황국민으로 동화(昇格)하는데 i) 신민국의 강명 신천을 당돌하게 부르는 건 황국민의 존명을 훼손한다는 점이고, ii) 조선시대 영조 때에 영남유림이 대구(大丘)라는 지명에 대유공자(大儒孔子)의 함자(孔丘) 언덕구(丘)자를 피하자고 상소했던 ‘피휘사상(避諱思想)’에도 위배 된다는 점(避皇思想)이다. iii) 황국신민의 입장에서 황국신민의 서(皇國臣民の誓)를 직접적으로 거슬리는 언행이라는 개명논리를 통한 ‘당당한 친일애국’ 캠페인차원에서 지역유지들이 거론했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추진했던 캠페인이 물밑으로 조용히 흘러 들어 갔던 것에는 i) 황국지존을 훼손하지 않게 아예 다르게 강이름을 다시 짓자(別作江名), ii) 황국신민의 인식을 확연하게 ‘신민천(臣民川)’으로 개명하자(名臣民川), iii) 조선총독부의 의견을 물어서 신천(新川), 중천(中川)과 간천(間川) 가운데(擇新間川) 선택하자는 방안(問選間新) 등이 있었다. 그러나 요란스러운 갑론을박만 있었지 서민들은 “이 또한 지나가리(Et hoc transibit)!”라는 바람으로 조용하게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해방 후 6·25전쟁과 민생고에 시달리는 바람에 행복한 고민을 못 했다. 2000년 이후 지역사학자들 사이의 신간논쟁(新間論爭)이 ‘심심풀이 땅콩으로’ 혹은 ‘찻잔의 폭풍(マグカップの嵐)’으로 화제가 됐을 뿐이다.
 

 
글·그림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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