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떨어져 나간 저녁 놓친 빗방울
진흙 속에 얼굴을 묻고 운 적이 있다
눈이 내린다
너는 발자국도 없이 다녀가고 나는 유령처럼 빈방에 남아
키를 높이는 어둠과
막 녹기 시작한 흰 산을 층층이 바라보았다
◇이잠= 1995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해변의 개’, ‘늦게 오는 사람’.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도서 선정.
<해설> 키를 놓이는 어둠의 현상과 흰 산이 녹아내리는 현상을 동시에 본다. 빛과 어둠의 두 현상을 그라데이션으로 설정하고 있으면서 비와 눈물의 객관적 상관성을 통해 시인은 감정을 그러데이션하고 있다. 삶은 이렇듯 단색일 수는 없으며, 고착된 어떤 사실마저도 교차 되는 빛과 어둠을 만나면 나름의 변신을 꿈꾸게 된다. 시인은 지금 “눈이 내린다/ 너는 발자국도 없이 다녀가고 나는 유령처럼 빈방에 남아” 빈방을 또한 희망 절망을 번갈아 덧칠하며 그라데이션 하고 있다. 견고하고 딱딱하기만 하던 감정들이 진흙처럼 말랑해지는 순간이다.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