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컬럼] 세월이 가면
[문화컬럼] 세월이 가면
  • 승인 2023.07.1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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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국 칼럼니스트, 전 대구문예회관 관장
#오랜 벗과의 만남 : 소식이 끊겼던 오랜 벗을 거의 30년 만에 만났다. 해외에서 살고 있는 그가 잠시 와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지인을 통해 연락처를 받고 만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전날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단다. 그래서 점심약속이 갑자기 문상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고인께서는 워낙에 장수하셨고 마지막까지 당신 의지대로 움직이셨다고 들었기에 그만하면 호상이라는 생각에 비록 상가에 가는 길이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울로 향했다. 역시 세월은 비켜갈 수가 없다. 시간의 흔적이 H의 얼굴에 남아 있다. 또한 그의 모습에서 나의 얼굴이 비쳤다. 지나가버린 세월에,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을 생각하니 묘하게 감정이 북받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일시 귀국 중인 그를 이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항상 용기백배하던 청춘들의 30년 세월은 어느덧 잔주름을 얼굴에 남겼다.

H와는 특별한 인연이다. 학번은 나보다 빠르지만 나이가 나보다 몇 살 어린 관계로 형과 아우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이 친구가 로마에 거주하는동안 당시 나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로마에 가게 되면 내가 신세를 참 많이 졌다. 그는 노래에 미쳐(?) 결국 소리를 뚫고야만 의지의 한국인이다. H와 만나면 남 얘기 할 시간이 없다. 서로 언제나 노래이야기만 한다. 상가에서도 그랬다. 그는 이런 순수한 열정이 가득한 친구라 만나면 항상 미소를 짓게 된다. 그와 함께 밥 먹고 노래하던 시절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데 뭔가에 쫓기듯 살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 세월이 가면 우리의 모습에 시간의 흔적은 남지만 그 시절이 어제인 듯 마음은 아직도 거기에 있다.

#장마철 빨래 : 마루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이 빠르게 흘러간다. 더 높은 하늘의 구름은 고요히 있는데 그 아래 세차게 흘러가는 구름의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고 한편은 신비롭기도 하다. 지금과 같은 장마철의 불편함 중 하나는 빨래를 바싹 말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장마철이면 건조기를 사야하나 생각하지만 햇빛에 고슬고슬 말린 빨래가 그리워 아직도 건조기는 사양하고 있다. 햇빛에도 말리고 건조기도 함께 쓰면 되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아직도 나는 베란다의 한 조각 햇빛에 의지한다.

“야야 니 속옷은 우째 이리 뽀얗다 못해 포르스름하노!” 군대 생활 중 휴가를 온 나의 속옷을 본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이다. 강원도 전방에서 한 겨울에 따뜻한 물도 제대로 없이 빨래를 하노라면 손이 며칠간 욱신거릴 정도로 시리다. 하지만 여름에 부대 내 흐르는 계곡에서 목욕과 더불어 하는 빨래는 놀이처럼 즐겁다. 한 밤중에도 보초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거의 예외 없이 계곡으로 내려가 샤워를 한 후 잠자리에 든다. 그때 널어놓은 빨래는 한낮의 뜨거운 햇살아래 정말 백옥처럼 뽀얗게 된다. 나는 한옥에서 거의 30년 가까이 살았는데 지금도 볕 좋은 여름날 마당에 잘 말린 옷과 이불에서 나던 향기를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께서 깔아주신 새 이부자리에 쏙 들어가면 그 바스락 거리는 촉감과 특유의 냄새가 지금도 그립다. 눅눅한 이부자리를 대하게 되는 이런 장마철이면 언제나 옛날이 그리워진다. 세월이 가면 기억도 희미해 질 법 하건만 그 촉감과 냄새는 아직도 이리 생생하게 남아있다.

#호랑가시나무 : 최근 텔레비전에서 호랑가시나무를 소개하는 것을 보았다. 나무가 어려서 묘목일 때나 사람의 손이 자주 닿는 곳의 잎은 5개의 뾰족한 가시가 있어서 마치 호랑이 발톱과 같다. 그러나 나무가 자라서 나이를 먹으면 가장자리의 가시는 퇴화하고 하나의 가시만 남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람의 삶과 비교하였다. 나무가 약할 때는 가시가 많다가 성장하면서 점차로 그 가시가 사라지는데 우리도 그러해야하지 않겠나! 가시 돋친 삶은 상대적으로 스스로 약하다는 반증이 아닐까하는 얘기였다.

많은 교훈을 주는 말이다. 한때는 가시 돋친 뾰족함을 멋진 개성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주변사람에게 까칠하게 구는 것을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기도 했다. 일에 있어서 까다롭게 구는 것과 정확하게 하는 것을 동일시하기도 했다. 호랑가시나무의 이야기는 그 차이를 알게 해주는 것 같다. 세월이 가면 가시들이 빠지고 그래야 하건만…. 머리로야 잘 알고 있는데 제 버릇을 어찌할지 두고 볼 일이다.

이소룡은 우리들 청춘의 시절에 우상이었다. 그의 사후 50년을 맞은 지금, 젊은 층에서도 그가 창시한 절권도 뿐 아니라 남긴 어록에 열광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은 시간이다. 인생은 바로 시간과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한 시간을 쓰면, 쓴 만큼 귀하게 잘 갚아나가야 한다. 세월이 가면, 그래서 나이를 먹는다면 제대로 해야 할 일은 이것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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