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영화가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
[백정우의 줌인아웃] 영화가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
  • 백정우
  • 승인 2023.07.2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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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줌인아웃지구의끝까지
영화 ‘지구의 끝까지’ 스틸컷

한 마디로 뭘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부리나케 분장하고 나가니 스태프는 먼저 촬영지로 떠났고, 겨우 도착한 아이다르 호수에선 괴물 물고기 포획 장면을 찍기는커녕 여성혐오를 겪는다. 간이식당 체험에선 생쌀과 익히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서 바삭바삭 달콤하다고 표현해야하고, 놀이공원에서 혼을 쏙 빼놓을 만큼 무서운 기구를 타고는 토하고서야 ‘컷’ 사인이 떨어지는 상황. 우즈베키스탄의 이곳저곳을 촬영하는 TV다큐멘터리 팀의 촬영현장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지구의 끝까지’는 방송사 리포터 유코의 시선을 따라간다. ‘지구의 끝까지’는 이중구조를 취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계획된 모든 것을 보여주려 애쓰는 영화 속 PD와, 정말 중요한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구로사와 감독. PD와 카메라맨은 어떻게든 대형물고기를 찍겠다는 쪽이지만 정작 관객이 만나는 건 호숫가에서 벌어진 여성혐오와 도시 곳곳에서 이를 악물고 분투하는 리포터의 모습이다. 관객이 궁금해 하는 것과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의 간극은 이토록 넓다는 얘기. 어쩌면 영화란 그 틈을 좁히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탄생 자체로 시각혁명이었다. 그러니까 19세기 ‘보는 것’의 시대의 종지부를 찍은 매체가 영화라는 얘기다.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짧은 시간 안에 예술의 총아가 된 영화에서 ‘보는 것’을 빼고는 말 할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감독들은 보여주지 않는 것에 집중했다. 예컨대 오즈 야스지로가 그랬고, 돈 시겔의 영화가 여기에 속했다. 예전에는 기술과 예산 때문에 보여주고 싶어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보여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에서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순간, 영화는 조금 더 세상의 속살과 가까워진다. 말하자면 뭔가를 보여주는 건 기술적으로나 서사적으로 어렵지 않은 반면, 가리고 감추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 시대에 구로사와 기요시가 선택한 것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표현하자는 쪽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지리도 모르는 리포터가 타슈켄트의 바자에서 길을 잃고 카메라를 버린 후 경찰서로 이송되었을 때, 그러니까 이국의 문화와 정서는 아랑곳 않고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써버린 후 제 멋대로 타인을 판단해버린 결과로 마주하는 건 TV 속 도쿄의 대화재 소식이다(이것은 명백히 3.11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내포한다.). 보여주고 싶으나 재현하지 않은 것, 즉 감독의 진짜 관심은 낯선 이들의 역사와 문화와 정서였다. 폐쇄와 근거 없는 우월주의가 가져올 비극의 재현이었다. 현지인 통역이 나보이 국립극장을 언급하며 2차 대전 패전 이후 타슈켄트로 끌려와 노동에 종사하던 일본군 포로들의 역사가 있었음을 환기시킬 때(그러나 보여주진 않는다.),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사회의 병리를 해부하려는 구로사와의 속내와 만난다.

영화의 마지막. 산등성에서 자신이 풀어준 것과 비슷한 염소를 발견한 요코는 ‘사랑의 찬가’를 부른다. 180도 상상선을 위반한 정면 숏. 엔딩치고는 허망하고 유치하다. 그런데도 시원하고 장엄하고 뭉클하다. 역사의 무게 뒤로, 도쿄 화재의 아픔과 반성을 뚫고 솟아오르는 삶의 역동성이고 환희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고도 드러냈기에 최후에 만날 수 있는 희귀한 감정이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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