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신천변의 선비들, 붓 던지고 왜적에 맞서 칼 잡아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신천변의 선비들, 붓 던지고 왜적에 맞서 칼 잡아
  • 김종현
  • 승인 2023.08.0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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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신천 물길 따라 법고창신이 흘렀다
왜군, 청도-가창-대구 산책하듯 진입
대구부읍성 무혈입성해 백성들 약탈
손처눌, 1592년 파잠협곡서 복병전
손린, 벼슬살이 접고 칼잡이 자처해
우뚝한 충성은 거센 파도에 지주 같아
봉산서원 ‘신천변 선비’들 역할 기억
금호강중류
금호강 중류 그림 이대영

◇임란 때 신천 섶에서 살았던 사람들

임진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선발부대는 동래성을 함락한 뒤 제1진 1만여 명의 병력으로 기장→ 양산 → 청도→ 대구→ 상주를 거침없이 단숨에 돌파했다. 4월 21일에 고니시에게 이미 점령당했던 대구성은 가토 기요마사의 제2진에게도 한번 더 유린당했다. 뒤이어 구로다 나가마사 제3진도 대구(요충지)를 거쳐 북상했다. 이렇게 연속적인 무혈입성이란 치욕을 당함에도 대구도호부 성주 윤현 부사는 왜군의 예봉을 피하고자 군민 2천여 명으로 공산성으로 물러나 방어진영을 구축했다. 대구부읍성을 함락한 모리 테루모투의 제7진은 향교에 1천600여 명의 후미방어대를 주둔시켰다. 그로 인해 공산성 관군은 8~9월까지 아무런 대응조차 못 했다.

그때 창의병(倡義兵) 의병장 서사원의 ‘낙재일기(樂齋日記)’ 1592년 4월 21일자 글에는 “말을 타고 (대구부 읍성)서문 밖으로 달려가니 문은 활짝 열려 있고...한 사람도 성(城)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의 4월 22일자 기록은 “아침에 응봉(凝峰, 456m 지묘동)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청도 팔조령을 넘으면 가장 먼저 동네였던) 파잠(巴岑)과 상동(上洞)에서는 불꽃이 이어지기 시작하였다…이윽고 수성현 안에서 불꽃이 매우 치열하더니 얼마 후 읍내에서도 일어났다”고 적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청도→ 남성현 → 경산 → 대구로 왜군이 진입했을 것 같았으나 당시 영남대로였던 청도 → 팔조령 → 가창 → 파동 → 수성 → 대구(신천물길 따라)로 산책하듯이 소서행장의 제1진 1만여 명이 슬슬 들어왔다. 당시 전시연락수단이었던 봉수망은 낮에는 연기(燧, 가축분뇨를 태워 연기 피움)로 밤에는 홰(炬, 싸리나무와 관솔로 불꽃)로 밤낮없이 청도남봉대 → 팔조령 북봉대 → 법이산 봉대로 연결했음에도, 대구부읍성의 성주는 읍성을 비우고 없는 바람에 왜군은 무혈입성했다. 남아있던 백성들에게 약탈은 기본이고 도륙당한 백성들의 핏물과 시신 토막은 신천변에 쌓였고 물길 따라 흘러 떠내려갔다. 7월 6일에 비로소 팔공산 부인사에 의병창의가 있었으나 빈손으로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었다. 뒷날 파동협곡에서 복병전을 전개했던 전계신(全繼信, 1562~1614)의 활약이 있기 전에는 점령군 왜군들의 세상(別有天地)이었다.

임진왜란을 시점으로 신천 섶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팔조령을 넘어오면 우미산(牛尾山) 아랫마을인 우록리(友鹿里)엔 왜장 사야가(沙也可, さやか)를 향배하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오늘날 있지만, 당시 그는 국왕 선조로부터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어 더 내려오면 파잠의 옥산전씨 집성촌에선 전경창이 계동정사(溪東精舍)에 터전을 잡았고, 전계신의 후손은 무동재를 세웠다. 상동 일직손씨(一直孫氏)의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1553~1634)은 강학당 영모당(永慕堂)에서 그리고 손린은 후손들이 세운 봉산서원의 봉암사(鳳巖祠)에서 배향되고 있다. 가창 최정산 기슭에서 만년을 보낸 두사충은 후손이 만촌동에 마련한 모명재에서 배향을 받고 있다.

왜군장수 김충선과 명군장령 두사충을 제외한 향토선비들을 평생 붓만 잡고 살았던 문약한 선비들로만 봤다가는 큰코 다친다. 손린의 문집인 ‘문탄선생문집(聞灘先生文集)’에서 “왜적들은 흰 칼날을 겨누면서 둘러서서 나를 노려봤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독서를 계속했다. 6~7명 왜적들이 그만 보다가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이렇게 문약함 속에서도 신천변의 선비들은 붓을 던지고 끝내 칼을 잡았다. 1592년 7월 6일 의병창의를 해 공산의진군(公山義進軍) 수성대장을 맡았던 손처눌은 1592년 9월에 파잠협곡에서 복병전을 전개했다. 고향산천을 지키고자 귀향한 전계신도 파동의 골짜기를 이용해 치고빠지는(hit and run) 유격전(遊擊戰, Guerilla warfare)을 펼쳤다. 그때부터 왜병이 안심하고 산책처럼 신천변을 진입할 수 없었다. 손린도 벼슬살이를 접고 정묘호란 시기 의병장으로 칼잡이를 자처하면서 고향을 지키겠노라 “위험을 보고선 목숨을 내놓았다(見危授命).

◇중류지주(中流砥柱)처럼 세상의 버팀목으로

침입로였던 신천변의 선비들은 확연히 변혁했다. 선비정신의 근본이었던 올곧음은 더욱 굳어졌고, 철학적 이상은 더 높아졌다.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당시를 살았던 손린 선비의 ‘문탄십경(聞灘十景)이란 시(詩) 가운데 ‘버드나무 연못 가의 선돌(柳淵立石)’에서 “연보 당년에 여왜씨의 손길을 벗어난 것을, 하늘이 지주를 시켜 무너지는 물결을 진정시켰네”라고 노래했다.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선비의 뜻을 중국 황허 삼문협의 물길을 바로잡고 있는 돌기둥에 비유하여 ‘중류지주(中流砥柱)’, 지주비(砥柱碑) 혹은 용문(龍門)라고 표현했다. 영남선비들 가운데도 1587(선조20)년 인동 현감 류운용은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선산 오태동에 ‘지주중류(砥柱中流)’라는 비석을 세웠다. 이런 지주라는 표현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수없이 많다. 대표적으로 인조23년 3월 22일 우승지 상소문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우뚝한 충성과 큰 절조는 마치 거센 파도에 지주(砥柱)와 같으니…” 표현이 나오고 있다. 가장 많이 나온 때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별세하자 문하생들에 상소문 혹은 제문으로 숙종 13년부터 15년까지 20여 차례 국왕에게 올려 거론을 시작했다. 숙종13년 4월 14일자에서 송시열을 비유해서 ‘지주(砥柱)’혹은 ‘일성(一星)’이라는 표현과 ‘옥쇄(玉碎)’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숙종 15년 6월 3일자 기록에서 김창협(金昌協)은 “꿋꿋한 지주(砥柱)는 홍수 속에 우뚝하고, 늠름한 푸른 솔은 한겨울에 빼어났다.”고 송부자(宋夫子)를 칭송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야단법석을 떠는데 정작 지주가 있는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제(齊)나라 안영(安瓔, 출생미상~BC. 500)이 저술한 ‘안자춘추(晏子春秋)’에 “한번은 내가 왕과 함께 강을 건널 때 거북이가 마차 왼쪽에 있는 말의 발을 물고 그것을 지주산 기슭의 흐르는 물속으로 끌고 갔다”는 구절에서 시작되었다. 1941년 5월 25일 마오저뚱(毛澤東, 1893~1976)이 “극동 뮌헨의 새로운음모침입에 대해”라는 통지문에서 “공산당의 영도적 무력과 인민의 항일전쟁이 중류지주가 되고 있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이런 신천변 선비들의 지주역할(砥柱役割)을 되돌아볼 수 있게 봉산서원(鳳山書院, 수성구 상동340-1)의 정문은 지행문(砥行門)이고 강당은 지행당(砥行堂)이라고 했다. 손린의 장남 손처각(孫處恪, 1601~1677)이 “아버지께서 일찍이 손수 ‘숫돌처럼 이름값하는 행실을 하라(砥礪名行).’는 4자를 앉는 자리 우측에 써 붙였다.”라고 ‘문탄집’ 유사편에 기록하고 있다. 그가 남긴 글로는 “호조참의 손공 묘갈명병서(戶曹參議孫公墓碣銘幷序)”가 남아있다.

임란종전 뒤 북인 집권으로 성균관 문묘종사에서 이언적과 이황을 제외하고 조식을 제향하자고 함에 그가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벼슬길이 막혔고, 심지어 “10년간 유안(儒案)에서 이름을 없애는(削名三字儒案十載)”불명예를 당했다. 조선시대 향촌사회 지배층의 자치기구였던 유향소(留鄕所 혹은 향교)에서 사족의 명부를 작성했는데 이를 향안(鄕案) 혹은 유안(儒案)이라고 했다. 향촌사회에 살고 있는 재지사족(在地士族)들 가운데 등록된 향원의 명단을 유향소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향안록(鄕案錄), 향적(鄕籍), 향중좌목(鄕中座目) 등 십여 가지 명칭이 있었다. 고려시대 사심관(事審官) 기능을 계승했던 조선 초기 경재소(京在所) 혹은 유향소(留鄕所)에서 기록 관리했던 ‘유향좌목(留鄕座目)’에서 유래됐다.
 

 
글= 권택성<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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