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따라잡기] 이기성 개인전…윤선갤러리 10월22일까지
[전시 따라잡기] 이기성 개인전…윤선갤러리 10월22일까지
  • 황인옥
  • 승인 2023.08.2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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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균형 보다 긴장·불균형 통해 ‘새로운 세계’ 만들어
선·면 등 단순해도 해석 여지 넓어
쇳가루·여백 경계는 ‘우연의 효과’
갈변·부식 등 우연성 기꺼이 활용
캔버스 평면에 조각 하듯이 작업
붓·물감 대신 손·쇳가루 등 이용
오페라갤러리 계약 ‘기량’ 검증
Kalpa 23100-007, 2023, mixed media on canvas, 162 x 130 cm
이기성 작 ‘겁’ 연작

선(線)이 더덩실 춤을 추자 담백하고도 유려한 세상이 펼쳐진다. 때로는 선과 선이 협공을 펼치기도 하는데, 그런 공간에선 존재와 존재가 부딪치며 새어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선들의 밀착으로 형성된 면에선 세상 너머의 기운이 넘실댄다. 그 세계에선 가없는 고요만이 존재한다. 전통 서예의 획이나 서양화의 드로잉이 연상되는 이기성 작가의 ‘겁(劫·Kalpa)’ 연작이다. 선과 면, 그리고 여백이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획득한 화면인데, 수없이 교차하는 감정선들이 오고간다. 단순하지만 해석의 여지가 넓다는 이야기다. 이는 그의 추상회화가 가지는 힘이다.

무릇 획이나 드로잉은 순간적인 신체 행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자양분으로 한다. 색채나 형태보다 몸의 기운이 선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높은 완성도는 오직 작가의 축적된 내공의 힘이 준 결실이다. 이기성이 구축한 거친 듯 하면서도 정제된 선들에서 내재된 강인함을 어렵잖게 발견하는 이유는 몸에서 캔버스 표면으로 표출된 그의 응집된 기운이 화면 가득 존재감을 발한 까닭이다.

여기까지면 그의 작업이 그저 선(線)으로 간단명료하게 구성한 차가운 추상으로 치부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의 화면에선 뜨겁고 강렬한 그 무엇이 존재한다. 바로 부식된 쇳가루가 뿜어내는 강렬한 기운이다. 차가운 물성인 쇳가루를 부식시켜 차가움과 뜨거움을 병치하자 화면은 강 대 강의 대결로 팽팽해졌다.

강 대 강의 대결에서 긴장감은 몰입도와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강렬한 기운은 애초에 물성 자체에서보다 물성이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강화된 효과다. 여기서 그가 추구하는 개념 하나가 언급된다. 그것은 ‘변화하는 존재의 속성’이다. ‘변화’는 그의 작업에서 가장 강조해야 할 대목이다. “제 작업의 주제는 시간에 따라 변하고 소멸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변화와 소멸은 필연적으로 시간과 상관관계를 맺는다. 시간의 지배 속에 놓여지는 모든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결국 소멸한다. 변화와 소멸의 바퀴 속에 놓여진 모든 존재는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의 작업에서 시간이 전제되는 이유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쇳가루가 부식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가 시간을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이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물리적 공간의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변화합니다. 저의 그림은 모든 것이 변화해 상쇄한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을 겪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쇳가루라는 물성은 간단치 않은 재료다. 특히나 부식과정까지 작업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면 물성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필요로 한다. 다루기 어려운 물성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기성은 주저 없이 쇳가루를 선택했다. 필연적으로 쇳가루와 인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 분명한 이유는 있었다. 바로 존재의 본질을 향한 갈증이었다.

모든 존재는 존재하는 동안 변화를 겪고 종국에는 소멸에 이른다. 생과 멸 사이에 수많은 변화들을 겪지만, 오직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생멸한다’는 자연의 준엄한 질서다. 생멸의 고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가 ‘생멸’하는 자연의 질서를 관장하는 뿌리, 즉 ‘존재의 본질’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영원하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가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관심인 것이고, 그 역시도 그 이끌림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인간과 시간과 공간으로 이뤄진 4차원만 인식합니다. 하지만 무(無)의 세계는 존재하며,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선 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면세계에선 무(無)도 없고 공(空)도 없는 ‘본질의 세계’, 즉 초월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쇳가루를 산화시키는 작업 과정이나 몇 가닥의 선으로 완성된 형상을 간결하다. 쇳가루를 캔버스에 올리고 손이나 나뭇조각으로 일필휘지의 기운으로 그으면 50% 공정이 마무리된다. 약간의 산화 기간을 거친 후 고착액을 뿌리면 완성된다. 고착액 분사는 시간차를 두고 3~4번 더 진행된다. 산화 횟수가 높을수록 표면의 거친 질감은 강도를 더해간다.

특이하게도 쇳가루와 여백 사이에 미세한 경계지점이 발견되는데, 이는 우연에 의해 획득한 효과다. 쇳가루 위에 고착액을 뿌려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갈변(褐變)현상으로 드러난 흔적인데 자연스럽게 쇳가루와 여백 사이의 경계역할을 한다. 갈변은 손이나 나무막대로 코팅하지 않은 생지에 고착액을 뿌린 까닭에 쇳가루에 흡수된 고착액이 캔버스 표면에 스며들어 생겨난 효과다.

갈변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다. 서로 다른 물성들이 맞부딪히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우연적 효과다. 그는 우연적인 효과를 작업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인식한다. 때로는 개인의 주체성보다 환경적인 요인이 더 강렬한 힘을 발휘할 때가 있는데,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한탄은 환경에 지배될 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작가에게 이 우연성은 창작을 강화하는 요소가 된다.

그는 우연성의 힘을 믿고, 우연성을 기꺼이 활용하는 작가다. 갈변이나 쇳가루의 부식 과정에서 환경에 의한 우연적인 효과를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이는데 적극적이다. 시간과 온도와 습도에 따라 쇳가루가 산화하거나 고착액이 캔버스 표면에 흡수되는 양상은 그야말로 제어 불가능한데, 작가는 그것마저 작업의 일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가 “그것이 자연을 따르는 태도”라고 했다. “저 혼자만의 작업보다 환경으로부터 얻는 우연적인 효과와 함께 하면 더 깊고 다채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자연이 환경에 몸을 내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죠.”

자연을 따르는 태도는 ‘존재의 본질’을 향한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으며, 그런 태도는 작업 전반에 걸쳐 실천된다. 가공하지 않은 생지와 쇳가루를 채택한 것이나, 고착액을 생지가 흡수하는데 개입하지 않는 것이나, 붓이나 물감 등의 가동된 재료보다 쇳가루나 나무막대 등의 자연 재료를 선호하는 것, 쇳가루의 산화 과정을 수용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핵심 재료는 쇳가루다. 쇳가루를 물감 대용으로 선택한 데는 그의 남다른 기질이 작동했다. 그는 평면회화 이전에 조각에 애정을 쏟았다. 버려진 악기들을 수집해 쇳가루를 분사하고 산화시킨 후 조각이나 설치 형식으로 작품을 제작했고, 이후 쇳가루를 캔버스 표면에 올리고 캔버스 뒷면의 자석의 움직임으로 패턴을 만드는 방식으로 변화한 ‘존재로부터-그리기(Within Being-Draw)’ 연작을 거쳐 지금의 ‘겁’ 연작으로 진화했다. 조각에서 반입체로 변화를 거듭했지만 출발은 늘 조각이었다.

“캔버스라는 평면에 쇳가루 작업을 하지만 저는 늘 조각을 한다는 입장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조각은 제 작업의 출발이자 종착역입니다.”

재료와 표현 방식의 변화에 따라 작업의 내용인 개념들도 변화를 거듭했다. ‘존재로부터-그리기’ 연작에서 혈연, 학연, 지연에 따라 사람을 왜곡하는 사회현상을 다뤘다면, ‘겁’ 연작에선 ‘생멸’에 대한 환기로 ‘존재의 본질’을 표현했다.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현상계에서 완전하고 영원불변한 현상계 너머의 세계로 이동한 것이다.

현상계에서 현상계 너머로까지 의식의 지평을 넓히며 조형적으로도 깊이를 더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과 시간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도시 외곽의 조용한 자연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속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자연 순응적인 태도가 짙어지면서 받아들인 가치들이다. 여기에 외로움은 그의 작업을 풍요롭게 하는 또 하나의 동력이다. 자연에서 세상과 단절되다 시피 하며 하며 작업에만 몰두하며 찾아온 외로움을 수용하면서 그의 작업은 한층 더 풍요롭고 깊어졌다. “바깥 세상과 단절되다시키 하며 작업에만 몰두하다보면 외롭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을 기꺼이 즐기고 있습니다.”

가공하지 않은 생지, 붓 대신 손이나 나무막대, 물감 대신 쇳가루 등을 통해 조각 같은 회화를 추구해온 그다. 특히 그는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세계에 유달리 갈증이 깊었다. 작업을 통해 안정보다 긴장, 균형보다 불균형을 시각화하고자 한 이유도 독자성을 향한 노력이었다.

그런 그의 작가 정신이 가시적인 결실로 연결되고 있다. 재료의 물성과 작업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그의 작업이 최근 세계 주요 도시에 거점을 둔 오페라갤러리와 전속계약으로 연결됐다. 이런 성과는 세계적인 기량에 대한 검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양한 ‘겁(Kalpa)’ 연작 신작들을 소개하는 윤선갤러리 이기성 개인전은 10월 22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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