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 작가 개인전, 칠순 화가가 ‘동화 같은 그림’ 그리는 까닭은…갤러리 오모크 내달 7일까지
신철 작가 개인전, 칠순 화가가 ‘동화 같은 그림’ 그리는 까닭은…갤러리 오모크 내달 7일까지
  • 황인옥
  • 승인 2023.08.2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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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어린시절 그리움 등 시각화
누이들 희생적 삶이 상처로 남아
모든 조형요소는 소녀 행복 도구
잘 그린 그림 보다 착한 그림 추구
풍경·사람 단순화로 주제 강화
그림 감상자들 위로·치유 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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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오모크에서 개인전을 진행중인 신철 작가가 갤러리 오모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황인옥 기자

단발머리를 한 젊은 여성이 꽃분홍 원피스에 빨간 구도를 신고 목가적인 풍경 속에 서 있다. 한껏 멋을 냈지만 차가운 도시여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얼굴이나 외형에서 역력하다. 신철 작가의 일명 ‘단발머리 소녀’ 그림인데, 정확한 제목은 ‘기억 풀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 따스했던 사람들, 질펀한 고향 풍경,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 등의 감정들을 순수한 소녀의 모습에 은유했다.

‘단발머리 소녀’와 함께 그의 그림을 수식하는 또 하나의 단어는 ‘동화같은 그림’이다. 고향과 어린 시절 그와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따라가며 만난 순수한 감성을 동화같은 풍경으로 시각화했다. 순수를 극대화하는 매체로 동화적인 요소를 끌어들인 것. “동화같은 표현은 그리움을 순수로 승화한 것이었어요.”

동화 속 주인공을 닮은 단발머리 소녀와 목가적인 풍경은 그의 고향 청산도로부터 출발했다. 단발머리 소녀는 그의 외사촌 누이들이고, 평화롭고 고즈넉한 풍경은 청산도의 산하다. 청산도는 완도에서도 50여 분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먼 섬이다.

그는 청산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청산도에서의 삶은 비교적 풍요롭고 따뜻했다. 하지만 5살 무렵 부친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삶은 요동쳤다.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했던 그의 모친이 가정 경제를 꾸리기 위해 일터로 나가게 되자, 그는 친척집을 전전했다. 화면 속 ‘단발머리 소녀’는 그때 그가 보았던 이종사촌 누이들이다.

남아선호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이종사촌 누이들을 일찍부터 직업전선으로 내몰았고, 소녀들의 희생을 지켜보는 그의 가슴에도 생채기가 났다. 어쩌면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했던 누이들의 힘겨운 삶에 자신의 삶이 겹쳐졌는지도 모른다. “누이들을 제 그림 속에서 위로하고, 그들에게 행복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의 어린시절에는 남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은 어디까지나 조연의 역할로 제한됐다. 하지만 청산도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존재하는 조연이 아니다. 그들은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고, 그들의 얼굴에서 더 이상 어둠의 그림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때로는 멋진 남자에게 사랑을 듬뿍 받거나, 연인과 자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며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다. 그가 표현하는 모든 조형요소들은 단발머리 소녀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작품 속 단발머리 소녀는 누이들일 수도 있고, 세상의 상처받은 모든 사람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행복한 일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죠.”

누이에 대한 애틋함과 고향에 대한 향수는 남도의 채도 높은 색채와 단순한 형태로 표현된다. 밝은 색채와 형태의 단순함으로 마치 어린아이 그림처럼 유치하고 촌스럽다 느낄 수 있지만 그는 “이것이 제 사춘기 때의 모습”이라며 웃는다. 그는 잘 그린 그림보다 착한 그림을 추구한다. 감상자로 하여금 위로와 치유가 되는 그림이다. “제 그림을 보고 어린 시절 순수했던 때로 잠시 되돌아가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따뜻하고 밝은 풍경으로 위로를 건네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일상생활에서부터 구체화된다. 일상에서 만나는 행복한 풍경을 그림의 소재로 채택하고, 자신만의 간결하고 따스한 풍경으로 재해석한다. “길가에서 만난 예쁜 소녀나 연인이나 친구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중년여성들의 모습에서 행복감이 묻어납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죠. 그들을 화폭에 담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의 그림은 소시민에게 건네는 위로인 것이다.

간결하고 단순화된 표현은 세월이 그에게 준 선물이기도 하지만, 경기도 양평의 호젓한 작업실에서 생활하며 얻은 가치이기도 하다. 전시 이외에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오직 작업실에서 작업에만 몰두하면서 무욕적인 자연의 덕성을 발견하게 됐다. 무엇보다 양평에서 고립된 가운데 찾아온 외로움이 채움에서 비우기로 태세를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사람들 속에서 너무 행복하면 그림에 재미를 붙일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외로울수록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많이 비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작업이 간결해지고, 반면에 작업의 밀도는 더욱 높아지죠.”

사람이나 풍경의 단순화는 내용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방편이다. 형태의 단순화로 본질만 포착하고, 그 속에서 향수와 그리움, 그리고 그가 건네는 위로의 메시지는 강화된다. “너무 잡다하면 주객이 전도될 수 있죠. 간결함 속에서 핵심만 잡아내 주제를 강화하려 했어요.”

‘순수’와 ‘동화’라는 단어는 어린아이의 전유물이다. 하지만 그는 칠순을 갓 넘긴 초로의 화가. 그가 “젊은 시절에는 젊은 특유의 열정으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많은 이야기를 하려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제는 핵심 단어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깊고 넓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세월이 준 내공이 간단치는 않다는 의미였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그 미소 속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표정 하나가 백 마디의 말을 대신하는 힘을 가졌죠.”

동화같은 순수한 그림을 선호하지만 화풍의 변화를 거쳐왔다. 70년대와 80년대가 무채색 계열의 평면에 천착하며 도시인의 외로움을 표현했다면, 이후에는 콜라주 작업까지 더하며 발언의 영역을 넓혀왔다. “젊었을 때는 사회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주로 비구상 추상형태와 무채색으로 표현됐죠.” 지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밝고 따사로운 구상풍경인 ‘기억 풀이’ 연작을 통해 행복 전도사를 자처한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행복한 그림은 어쩌면 자신의 행복에 대한 염원으로부터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일찍 부친을 여윈 그의 삶은 녹록치 않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엄습했던 외로움은 그림으로 해소했다. 그림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매체였고, 주위로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듣을 때마다 그림에 대한 애착은 더욱 짙어갔다. 자연스럽게 화면 속 내용은 그와 닮은 힘겹게 살아왔던 소시민들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화폭에서 그는 행복할 수 있었다.

“진정성있는 그림을 그리면서 신뢰받는 화가”로 사는 것이 작가로서 바라는 꿈이다. “한 눈 팔지 않고 그림에 정직하게 매진하는 것이 신뢰받는 화가가 되기 위한 지름길로 믿으며 캔버스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갤러리 오모크 신철 작가의 개인전은 9월 7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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