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과 사자가
만났을 때
가던 길을 멈추고
두려움을 외나무다리에 단단히 의지한 채
먼저 서로의
눈을 찬찬히 바라봐야 한다
누가 더 아픈지
슬픈지
위태로운지
그래야
둘 다 산다
◇한연순= 정읍 출생. 2000 ‘조선문학’ 시 등단. 조선시문학상, 인천 펜문학상, 인천문학상 수상. 2021년 인천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 ‘방치된 슬픔’(2002), ‘공기벽돌 쌓기 놀이’(2006), ‘돌담을 쌓으며’(2008), ‘분홍 눈사람’(2021)이 있음.
<해설> 해학과 禪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다. 이 시에서 외나무다리는 현실이고 눈은 결국 시인의 정신일 것이다. 아니 그 무엇으로 해석해도 된다. 외나무다리가 그렇고 목이 긴 기린이나 이빨이 사나운 사자가 아니어도 다리의 난간 아래는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현실이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어떤 사회의 잘못된 구조 속에 우리는 길이 든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이다. 나이가 들면서 주변에서 나와 경쟁자로 느껴지는 누군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나쁜 비하의 습성이 생겨나는 건 아닌지, 인정할 건 인정하는 정도만 되어도 둘 다 살아남을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누가 더 슬픈지, 아픈지, 위태로운지를 안다면 그게 바로 둘 다 살아남는 방법이라 이 시는 알려준다. 상대의 눈을 더 잘 바라보기 위해서는 억지와 아집의 내 눈을 먼저 맑게 씻고 볼 일이다.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