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슬럼프를 건너며
[달구벌아침] 슬럼프를 건너며
  • 승인 2023.09.1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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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엊그제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에어컨이 '동작 그만' 하라는 가을의 신호에 맞춰 콘센트에 꽂혀있던 모든 코드를 내려놓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자기 몸을 뜨겁게 달궈 무더위에 지치고 곤한 사람들에게 선선한 바람을 내어주던 에어컨이었다. 내일이나 모레쯤 지나 곧, 다음에 올 계절을 기약하며 긴 동면에 들 것이다.
숨넘어갈 듯 울어대던 매미들 어느새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창밖엔 귀뚜라미들이 부르는 합창 소리 밤새 소란하다. 저녁에서 새벽으로 탈바꿈하는 지점 어디쯤에서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에게 느닷없이 문자를 보냈다.
"나는 잘 지내니 걱정하지 마. 너도 아프지 말고 잘 지내"
먼동이 트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가을이네. 난 요즘 에어로빅과 동네 뒷산을 걷고 있어. 낮엔 오랜만에 시내 서점에 들렀다가 친구를 만나 실컷 수다를 떨고 들어왔어. 너도 어서 빨리 지하 동굴에서 탈출해. 시간이 가면 어둠의 끝은 있기 마련이야."
더 이상의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다만 내가 나를 다독이듯 혼잣말로 '길을 발견하려면 길을 잃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라며 중얼거렸을 뿐.
한 심리학자가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한했다. '잠을 잘 잔다. 운동한다. 대화를 나눈다. 책을 읽는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기계들조차 한 계절의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모습이 슬럼프 구간을 지나는 우리들 삶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날씨나 바람 그리고 계절은 멈춰있지 않고 흐르지만 끝이 있듯 우리가 겪는 슬럼프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 가을엔 더위를 핑계로 미뤄두었던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워 친구의 당부처럼 지하 동굴에서 빠져나와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운동하고 이야깃거리를 찾아 대화하고 책을 읽으며 지나가기를 기다려보기로 한다.
"내면의 여행을 즐겨 보세요. 사람들 얼굴에 간간이 무심한 표정이 스칩니다. 무얼 하는 것일까요? 여행하는 겁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날마다 마주치는 표정이니까요. 열차는 아직 플랫폼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객실 안에선 깊고 나직한 한숨이 터져 나오네요. 하지만 한숨은 금세 흩어집니다. 목적지는 스톡홀름이나 예테보리 같은 곳이 아닙니다. 바로 내면의 세상이지요. 잘은 모르지만, 가끔 자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이에요. 마음 놓고 쉬면서 환상에 푹 빠져들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엔 거의 안 남았기 때문일까요? 어린 시절에 사랑했던 것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이 열차 안에 있습니다. 언젠가 여러분도 그 세상을 여행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저자 빌리 앤, 로르바르 뢰프그렌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에 나오는 대목으로 스웨덴 주 철도청의 1999년 광고 문구의 일부라고 적혀있다.
장석주 시인의 '일요일의 인문학'을 펼치면 맨 앞장 '책을 내면서'에 소개된 글로 시인은 아사 상태에 빠진 인문학을 염려하며 '열차'가 쓰인 자리에 '인문학'을 집어넣어 읽어보라고 권하고 있다. 뜻이 통할 거라면서.
늦잠에서 깨어난 일요일 오후, 햇볕 환한 마당에 나무 의자를 내놓고 여유를 누려보길 바랐다. 파자마 차림이라도 괜찮고, 눈가에 눈곱이 조금 달라붙어 있어도 괜찮다며 인문학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만, 자기 성찰의 계기를 만들고,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앎의 기쁨을 오롯하게 들려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금호강 다리 위를 지나가다 호랑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퇴근길이라 차가 막혀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그의 비행을 눈으로 따라가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나비는 한 번 쉬었다 갈 법도한데 강물 위를 날고 날아서 건너편을 향해 쉼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 날갯짓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문득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가 떠올랐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만약 강의 너비를 알았다면 나비는 강을 건널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무지의 힘' 알지 못함에서 오는 힘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강을 건너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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