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무의 먼 뿌리 한 지점에서
앞만 보고 걷던 나, 길을 잃었다
잃어버린 방향에 어리둥절
거미줄 같은 길감옥에 갇혔다
어둠 속 작은 모서리에 눌리고 눌려
화분 안의 꽃으로 피어나다가
갈증에 떠밀리던 기억도 희미해졌다
마비된 발바닥을 데리고 든 대동여지도
여기가 종로 뒷골목 어디인 것도 같은데
분간되지 않는 길은
올무에 걸려 죽은 짐승 같았다
살점 다 녹아내린 뒤에야
가시덤불 속에 남기는 인광빛
작은 길 여럿 거느린 사람은
자신이 걸어갈 길이 큰길이라 말하지만
몸의 뼈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갔다가 아니면 되돌아오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옛사람들 길의 설법 앞에서
지금, 현재 여기가 나
오래 아픈 통점임을 알았다
◇정양자=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세명일보’신춘문예로 데뷔. 형상시학회 회원.
<해설> 누구나 살다가 보면 길을 잃는다. 그런 길은 실제로 존재하는 길일 수도, 역사의 길일 수도, 심리 혹은 어떤 추상적인 길을, 가상으로 그려낸 그런 길, 그조차도 길은 길인 것이다. 시인이 지금 만나는 길은 실재의 길이며 한편으로는 통점에 이르는 몸의 길이다. 나무의 몸이 뿌리에서부터 가지 끝에 이르는 어떤 물길이 그러하고 사람의 몸속에 있는 선들 또한 시인은 길이라 본다. 대동여지도 속 한 남자의 발이 다녀간 그 길에서 시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어쩌면 아프지 않은 순탄한 희망의 길인 것이다.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