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인문학] ‘희생’이라는 이름의 생명의 빛
[치유의 인문학] ‘희생’이라는 이름의 생명의 빛
  • 승인 2023.10.0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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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삼
대구한의대 교수
오래 전 일이다. 필자의 ROTC 후보생 시절인 37년 전 학군단의 군기는 빡셌다. 물론 지금은 사라진 단지, 옛 시절의 추억일 뿐이다. 대학 3학년인 ROTC 1년차의 시간은 고단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매 맞는 일과 단체기합은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예외 없이 우리는 선배들의 호출에 학군단 피복고에 집합해서 기합을 받았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그날만큼은 필자의 삶에서 가장 강렬한 하루가 되었다. 좁은 피복고에 102명의 동기생들이 시루 속 콩나무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선배들의 훈시를 들었다. 곧 매타작이 시작되었고 간부들이 첫 희생타가 되었다. 매에 무슨 장사가 있던가? 누적된 매질에 간부 동기생 한명이 맥없이 쓰러졌다. 일어나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선배,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기생, 37년 전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입단 초기라 선배들의 군기를 강렬했고 우리는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필자가 손을 들고 선배에게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 질문 있습니다! 동기생 대신 제가 대신 맞으면 안돼겠습니까?”

“(짜증난 엄청 큰 소리로)뭐야!”

필자의 돌발 질문과 선배의 신경질적인 답변에 피복고는 얼어붙었다. 죽었다는 뜻이다. 몽둥이를 던지고 문을 박차고 나가는 선배들의 뒷모습을 모면서 우리는 생각했다. ‘아~ 이제 우리는 진짜 죽었구나’ 괜히 동기생 도우려다 선배들의 성질만 돋우었으니…. 10분 후 우리를 훈육하는 선배가 미소 띤 얼굴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우리가 너희들을 때리며 강하게 훈육한 것은 바로 동기들을 위한 희생, 이 한 가지 정신을 교육하려 함이었다. 오늘 비로소 그 목표를 달성했으니 이제부터 너희들의 모든 교육은 지성교육으로 바꾸겠다!” 그때부터 우리는 졸업 때까지 인격적으로 대접받았고 단 한대도 맞지 않았다. 그 엄청난 기억이 필자의 몸에 남아 있는 희생이라는 이름의 가장 강렬한 몸의 교훈이었다. 학창시절 수없이 들었던 대한민국 부모들의 교육지침. 나서지 마라! 중간만 해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난 늘 부모님의 교육지침을 어겼고 그 결정이 나의 미래를 바꿔놓았다. 그저 친구의 고통이 안쓰러워 대신 맞으려했고 용기 내어 손을 들었을 뿐인데 전체 동기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다는 경험은 정말 놀라운 감동이었고 생명의 빛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그후 그 놀라운 감동은 필자의 무의식을 바꾸었고 그 신념이 카우보이 교수 탄생의 바탕이 되었다.

남극에 사는 펭귄은 무리를 이루며 산다. 수백 마리의 펭귄들은 남극의 신선한 풍부한 치어들과 크릴새우가 그들의 주식이다. 하지만 쉽게 남극의 바다에 뛰어들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의 천적인 바다표범 때문이다. 언제 천적이 나타나 자신들을 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기 있고 똘기 넘치는 펭귄 한 마리가 과감하게 남극의 물속으로 뛰어들어 자유롭게 먹이사냥을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수백 수천마리의 펭귄들이 뛰어들어 함께 만찬을 즐긴다. 한 마리의 과감한 희생이 수많은 동료들을 배고픔에서 구하는 순간이다. ‘퍼스트 펭귄’의 스토리는 단순한 ‘선구자’ ‘도전자’의 관용어의 탄생이 아니다. 그 속에는 죽음과 고통이라는 아름다운 ‘생명의 불꽃’이 각인되어져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인 로마를 9번이나 물리치고 약 2년 동안 전쟁을 리더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스파르타쿠스라는 퍼스트 펭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믿는 하느님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자유' 오직 그것뿐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무장한 희생의 힘은 위대하다. 2,000년 전 자유를 외친 노예 스파르타쿠스를 우리가 기억하는 이유는 오직 순수한 생명의 불꽃 그것 때문이다. 불꽃이 꽃불이 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불씨를 공유한다. 함께 공유한 불꽃은 그래서 꺼지지 않는다. 스파르타쿠스의 불꽃이 아르헨티나에서 체 게바라를 낳았고 미국은 마틴 루터 킹을 낳았고 우리는 안중근을 낳았고 류관순을 낳았다.

모든 걸 비움으로 비로써 채워진다는 강렬한 문장 '텅 빈 충만(무소요)'의 역설도 자기희생의 결과인 셈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험한 돌산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인도인 만지히가 22년을 정과 망치만 가지고 돌산을 뚫고 길을 낸 것은 오직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생명의 불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또 다른 희생의 얼굴이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희생은 수많은 페르소나를 만들어낸다.

29년 전 1,000억 가까운 돈을 절에 모두 기부하고 돈이 아깝지 않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한때 자신이 사랑한 백석 시 한줄 만 못하다고 말한 김영한 길상사 시주자의 덤덤한 일갈은 닭살을 돋게 할 거인의 촌철살인 언어유희다.

고독과 두려움의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는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희생의 속살은 그래서 눈부시게 아름답다. 다가오는 가을 길상사 성모님을 닮은 관세음보살에서 희생이라는 이름의 생명의 빛을 만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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