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칼럼] 21세 안세영 선수가 보여준 ‘각본 없는 감동 드라마’
[화요칼럼] 21세 안세영 선수가 보여준 ‘각본 없는 감동 드라마’
  • 승인 2023.10.0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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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홍란 시인·문학박사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그때 그 물건이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정현종의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중


중국 항저우 빈장체육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보여준 안세영의 경기는 한편의 감동 드라마였다. 안세영의 상대는 5년 전 2018 자카르타-팔렘방 대회 때 1회전에서 0-2로 완패라는 뼈아픈 경험을 준 세계 정상의 천위페이다. 그 설욕을 뛰어넘기 위해 안세영은 1게임 막판 무릎에 부상을 당하지만 경기 내내 통증을 참아가며 코트를 누볐다. 통증 탓이었을까. 2게임을 천위페이에게 내주게 된다. 그러나 3게임에서는 시작하자마자 다시 투혼을 펼친다. 5점을 내리 획득하며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안세영은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그냥 코트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울었다. 그의 포효는 뜨거웠다. 관중석에서 응원하던 가족은 멀리서도 안세영의 불편한 움직임을 알아챘다. 어머니는 "포기해"를 외치고 외쳤지만 애타는 절규는 딸의 귓전에 가닿을 수 없었다. 중국 관중 사이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침묵으로 잦아들었다. "경기장에서는 좀처럼 아픈 내색을 안하는 딸인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며 "경기를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을 딸의 성격을 알기에 묵묵히 응원했다"며 아버지는 승리를 감격해 했다. 안세영의 귀에는 아무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애절한 "포기해"라는 소리가 들렸어도 그의 사전에 포기라는 단어는 없었을 것이다.

경기를 마친 안세영은 오른쪽 다리를 제대로 딛을 수 없는 상태였다. 시상을 마치고 내려올 때도 단상을 조심스럽게 한발씩 내디뎌야 했다. 평지도 절룩이며 걸어야하는 그런 부상도 아시아 정상을 향한 안세영의 집념을 꺾진 못했다. 이런 불굴의 투혼으로 빚어진 승리와 뜨거운 포효를 보면서 함께 큰숨을 몰아쉬며 절로 박수를 치게 된다.

안세영은 "잘 마무리할 수 있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애써 눈물을 감추며 말했다. 경기 도중 "무릎에서 '딱' 소리"가 났을 때 뼈가 어긋난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통증 때문에 힘들었지만 "다행이 걸을 수 있을 정도"에 그친 것에 대해 위안한다. "다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해서 꿋꿋이 뛰고 또 뛰었다는 스물한 살 앳된 안세영 선수의 말에서 또 한번 시간의 소중함을 발견한다. 다시 오지 않을 나의 기회를 허투루 써 버린 시간에 대해, 소중한 순간들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스쳐 지나친 맹목에 대해, 끝까지 투혼을 발휘하지 않은 미진에 대해 생각한다.

"솔직히 게임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겠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정신만 바짝 차리자는 생각으로만 뛰었다"는 안세영 선수, 그는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기쁨을 넘어 포효한다. 메달을 입으로 깨물거나 손으로 들어보이는 멋진 모습이 아니다. 두 눈은 꼭 감고, 이빨은 질끈 깨물고, 주먹은 허공을 향해 높이 치켜든 채 자신에게 꽃다발을 스스로 헌사한다. 그 포즈에서 안세영 선수의 불굴의 투혼을 또 한번 만나게 되고, 앞으로 보여줄 혼신의 열정을 기대하게 한다.


고국으로 돌아온 안세영은 한 인터뷰에서 "잘 마무리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참 아름다운 인사다. "솔직히 어떻게 경기가 끝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들렸어도 뛰었을 것이다". 참 아름다운 자세다. 안세영은 귀국 당일 바로 병원에서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하고, 이제 2024 파리올림픽을 정조준해서 다시 신체와 정신 재건에 몰입하고 있을 것이다.
안세영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항저우 최고의 순간'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명배우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안세영의 금메달이 무엇보다 극적이고, 감동적이고, 놀라운 것은 경기 중 일어난 감당할 수 없는 부상을 정신력으로 견디고, 이겨낸 결과였기 때문이다. 아니 어떤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한 투혼이다.

스물한 살의 안세영 선수가 오늘은 내게 말을 건다. "저는요 이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꿋꿋이 뛰었어요", "그 어느 순간도 제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냥 한 점, 한 점만 생각하고 경기에 임했어요", "다음 경기까지도 열심히 달릴 거에요" 여름 내내 달고 다니던 나의 잔병치레쯤은 툴툴 털어버리라고, 이제 다시 일어나 시작해 보라고 내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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