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 최병길 내달 2일 독주회·내달 10일 인문예술 콘서트
고수 최병길 내달 2일 독주회·내달 10일 인문예술 콘서트
  • 황인옥
  • 승인 2023.10.3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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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 최고 기량 끌어내는 ‘국악 타악기 1호 박사’
어릴적 밀양서 풍물놀이로 놀아
고교 시절부터 전통타악기 공부
대학때 도제식 교육에 ‘일취월장’
지역 국악연주자 거의 반주 경험
국악대회 80명 연주 혼자 맡기도
이론도 공부 교육자·연주자 병행
국악 장단 관련 저서 집필도 열정
관객을 청중 넘어 참여자로 유도
최병길_01
고수 최병길은 내달 2일 독주회, 10일 인문예술콘서트를 개최한다.

무릇 고수(鼓手)라 함은 북으로 판소리를 반주하는 연주자 정도로 이해한다. 판소리나 전통 악기 연주 때 반주를 하고, ‘얼씨구~’나 ‘좋다~’ 등과 같은 추임새를 넣어 연주회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는 연주자로 고수를 떠올린다.

고수 최병길은 고수가 주연일 수 있음을 온몸으로 강변한다. 11월에 예정된 독주회와 인문예술 콘서트에서 그는 무대의 주인공으로 고수의 정수를 선보이게 된다. 최병길의 독주회 ‘고수 최병길의 타악놀이Ⅱ-추임새’가 2일 오후 7시 30분 대구예술발전소 수창홀에서 열리고, ‘최병길과 함께하는 우리소리 맛보기’가 10일 오후 7시 범어도서관에서 진행된다.

그의 스물 네 번째 독주회인 이번 무대에선 추임새 ‘공감하다’와 김동진류 대금산조 맛보기, 장단의 길, 추임새와 함께하는 공연 ‘김동진류 대금 산조 전바탕’을 연주한다. 인문예술 콘서트에선 추임새 맛보기와 판소리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과 김동진류 대금산조, 중광지곡 중 ‘세령산’과 가야금 창작곡 ‘침향무’, 그리고 남도민요 ‘흥타령’과 ‘진도아리랑’을 연주한다. 이번 공연에선 대금 허정민과 가야금 정현희, 판소리 정해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 고수야말로 진정한 주인공

고수로 30여년을 살아온 그의 인생 여정은 고수가 “주연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하다. 대구에서 열린 수많은 국악무대에 올라 반주한 고수는 독보적으로 그였기 때문이다. 국악 연주 무대가 부족하다는 국악계의 현실적인 고민은 그로부터 비껴나 있다. “무대 밖에서도 대구경북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국악 연주자들이 저를 연습파트너로 할 만큼 고수로 너무나 바쁜 날들을 보냈어요.”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대구경북에서 그의 반주를 거치지 않은 국악연주자가 없을 정도다. 이만하면 그야말로 진정한 승자가 아닌가? 그는 고수를 중개인에 비유한다. 연주자가 최고의 연주를 펼칠 수 있도록 이끌고,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 역할로 고수를 바라본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 무대에 오른 독주자라도 고수가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의 오랜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최고의 연주자 뒤에 최고의 고수가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인 것. 국악에서 관객 호응도는 연주회의 성공을 가늠하는 요소인 만큼 관객의 흥미를 유도하는 것도 고수의 역할이다.

◇ 전통놀이문화 성횡했던 고향 밀양의 영향으로 고수의 길 시작

가야금이나 대금의 발상지는 경상도다. 소리는 전라도, 악기는 경상도라는 말은 이런 역사적인 배경과 관계가 깊다. 그가 북이나 장구를 배운 것은 이런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다. 밀양아리랑, 밀양북춤, 밀양백중놀이 등이 있는 예향의 고장인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 내내 적어도 한 달에 두 세 번 정도는 마을 어귀 밤나무 아래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 풍물놀이를 하며 놀았던 생생한 기억을 떠올린다. 밀양에서 경험한 전통음악과 함께하는 놀이문화는 지금의 그를 만든 일등공신이다.

“각종 절기만 되면 북, 장구, 꽹과리, 징을 치며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해 축제처럼 놀았어요. 그런 기억들이 국악을 진심으로 즐기는 연주자로 성장하게 했죠.”

중학교 때 부산으로 진학하며 국악과는 멀어지나 했지만, 그의 몸속에는 이미 국악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는 교내 활동 중에 자연스럽게 국악과 관련된 것을 찾았다. 특별활동으로 농악반에 들며 전통 타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 “농악반에서 부산시 무형문화재셨던 김한순, 정우수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선제가 옛날 가락을 친다고 하시면서 엄청 예뻐하셨어요. 밀양에서 어른들이 쳤던 가락이 현대적으로 변한 사물놀이와 달랐던 거죠.”

고등학교 시기부터 전통 타악기 공부가 본격화됐다. 민속음악의 대가로 일컫는 성금련과 지영희 선생의 장녀인 지수복을 스승으로 삼았다. “지수복 선생님은 가야금, 가야금병창과 판소리까지 넘나드는 국악 명인이셨어요. 당시 선생님 댁에서 북과 장구를 배웠어요. 국악을 배운다는 거창한 사명감보다 논다는 느낌이었어요.”

문제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일어났다. 타악으로 대학 진학을 꿈꾸었는데, 주위에서 극구 만류했던 것. 하지만 그는 때마침 대구예술대학(돈보스꼬 예술대)에 타악 전공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주저 없이 입학서류를 냈다. “당시 입학정원 40명 중에 타악 전공으로 2명을 뽑았는데 합격했죠.”

대학 정규과정에 편입됐지만 황병주 교수의 가르침은 도제식 교육을 방불케 했다. 서울 출신으로 대구에 혼자 자취했던 황 교수가 그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황 교수는 국내 최정상의 가야금 명인이며 KBS 국악관현악단 악장 출신이었다. 그는 황 교수 집에서 기거하며 배움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됐다. 현재 그의 스승인 김청만 고수도 황 교수의 소개로 만나게 됐다. 김청만 고수는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다.

대학 졸업한 새내기 연주자였지만 그의 반주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매 학기마다 학생들이 연주시험을 치르는데 반주는 그의 몫이 됐다. “매 학기마다 40여명의 반주를 4년간 맡은 것이 엄청난 트레이닝이 됐죠.”

◇ 계속된 전국 최초 1호 기록 보유

그의 인생은 최초 1호의 주인공으로 점철됐다. 국내에서 국악 타악기 1호 박사가 됐고, 대구시립국악단에 타악 연주자 1호로 입단한 기록도 거머쥐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대구시립국악단에서 최초로 타악연주자를 뽑았고, 그는 무난하게 입단했다. 국악단에선 마치 그를 기다린 듯, 그를 반겼다. 단원들의 반주 제의가 쏟아졌다. 외부 연주자들의 반주 의뢰도 쇄도했다. 연습실에는 그의 반주를 기다리는 연주자들이 줄을 섰고, 하루에도 두 세 번의 연주 무대에 오를 정도로 반주자로서의 활동은 거침이 없었다. 한해에 그가 반주를 맡은 공연의 팜플렛이 무려 400여장이 될 정도였다. “국악 대회가 열릴 때면 80명이 넘는 반주를 제가 다 한 적도 있었죠.”이는 그가 보유한 국악 연주곡이 엄청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는 타악 전공자로 박사 1호다. 먼저 황병주 교수의 석사 진학 권유로 영남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국악 타악 전공과정으로 개설된 대학원이 전무해 일단 음악교육대학원을 거쳤다. 이후 박사과정에 도전했고, 결국 전국 최초 1호 타악 전공 박사가 됐다. 당시로서는 실기자가 이론을 공부하는 일은 드물어 흔치 않은 케이스였다. 문제는 대구시립국악단이라는 안정적인 기반을 버려야 하는 것,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은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그는 안정보다 도전을 택했고, 결국 동아대에서 음악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취득 후 교육자와 연주자를 병행했다. 타악 박사 1호인 만큼 그를 부르는 대학은 많았다. 10여년간 전국에서 무려 11개의 대학에서 강연을 펼칠 만큼 교육자로서 바쁜 삶을 살았다. 연주 활동은 주말에 진행했다. 현재는 교육자의 삶에서 다시 연주자의 삶으로 돌아왔다. 강의는 최소화하고 본업인 무대 활동에 열심이다. 제자들에게 효율적인 교육을 위해 국악 장단에 관한 저서 집필 활동에도 열정을 할애한다. 지금까지 ‘동해안 별신굿의 음악문화’, ‘창작타악기 연주곡집’, ‘민요장단지도법’, ‘장구장단 지도법 산조장단편’ 등을 집필했다.

◇ 고수의 진정한 덕목은 소통력

고수는 눈치가 9단이어야 한다. 연주자의 감정선이나 컨디션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하고, 연주자의 연주력을 상승시키거나 보완하는 장단을 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덕목을 그는 이미 최적화 상태로 갖추고 있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가 반주한 연주자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이제는 척 봐도 연주자의 상태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이심전심인 상태가 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사람의 마음을 읽는 훈련이 돼서 그런지 교감하고 소통하는 것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관객과의 소통에도 열심이다. 스스로 해설자로 나서며 관객의 눈높이에 맞는 해설을 곁들인다. 특히 관객들이 진정으로 국악에 녹아들어 추임새를 하며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소통 시간을 가지고 연주에 임한다. “관객과의 소통 이면에는 그들이 단순한 청중을 넘어 참여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전통 국악 연주자의 삶은 외롭고 고단하다는 공식은 고수 최병길에 의해 깨지고 있다. 1년 내 무대에 오르고, 20대에 100평짜리 집을 살 수 있을 정도로 그에 따른 수입도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까지 써내려온 성과의 출발을 그는 “밀양 고향 사람들의 놀이 문화”였다고 회상하며 “행운도 한몫했다”고 겸손해했다. 다양한 전국 1호의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 시기미다 생겨난 타악 관련 프로그램들 덕을 보았다는 것. 하지만 그 무엇보다 앞선 덕목은 그의 도전정신이었다. 그 결과 그는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고법 이수자이자 국가무형문화재 구례향제줄풍류 장구부문 이수자로 지금도 새로운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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