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姓은 장소를 기준으로…氏는 자손들을 구분하는 것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姓은 장소를 기준으로…氏는 자손들을 구분하는 것
  • 김종현
  • 승인 2023.11.0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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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금호강 섶에 모여 살았던 ‘성씨의 고향’
한반도에 성씨가 도입된 기록
한자·중국 문물과 함께 들어와
나라·성씨가 동일한 한씨로 시작
삼한갑족설이 정설로 여겨져
우리 고대기록 한문으로 작성
한자와 같이 성씨가 도입돼
삼한
원래 한민족(韓民族式)은 복성(複姓)이고 중국은 단성(單姓)이었다. 그림 이대영

금호 하빈(河濱)은 조선 초까지 ‘사빈(泗濱, 오늘날 사수동과 하빈면)’이었으나, 1640년 칠곡도호부가 설립되고 난 뒤 문주방(文朱方) 사수리(泗水里)로, 1895년 칠곡군 문주면 사수리로, 1982년에 칠곡2동 사수리에서 2001년 3월 1일부터 행정명 관문동(關門洞), 법정동 사수동(泗水洞)으로 변경되었다. 이곳에 1617(광해군9)년에 한강(寒岡) 정구 선생이 75세 고령에 그해 2월 ‘사빈서재(泗濱書齋)’강학당을 열었다. 1618년 6월까지 1년 4개월간 제자 손처눌(孫處訥, 1553~1634), 이윤우(李潤雨, 1569~1634) 및 곽근 등 85명이 강학소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세웠다. 이곳에서 1620년 한강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사빈(泗濱) 관어대(觀魚臺, 사수동 734번지 일대)는 금호강 섶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강 선생이 사양서재(泗陽書齋) 혹은 사양정사(泗陽書院)에서 강학을 개최할 때는 관어대를 ‘격물치지’의 도량으로 활용했다. 이곳은 연경서원(硏經書院)과 이강서원(伊江書院)의 중간위치로 강학소와 시회(詩會)의 명당으로 이용되었다. 묵헌 이만운(李萬運, 1736~1820)의 ‘유관어대기(遊觀魚臺記)’란 작품에서는 “사빈(泗濱)섶 남쪽(陽)에 관어대(觀魚臺)라는 곳이 있었다(泗水之陽, 有曰觀魚臺者).”, “정구, 장현광 등의 제현들과 한때 같이 걸어가면 물고기를 봤기에 이름을 관어대라고 붙였다(鄭文穆先生, 與旅軒樂齋, 一時諸賢杖遊賞, 而命名之)”고 기술하고 있다. 관어대가 설립된 때는 대략 1614년에서 1620년까지로 짐작된다.

이곳에서 창작한 한시는 대략 20여 수나 된다. 세어본다면 도성유(都聖兪,1571~1649) 3수, 정유식(鄭惟軾) 1수, 정익동(鄭翊東,1735~1795) 6수, 우성규(禹成圭, 1830~1905) 1수, 구태서(具泰書) 1수, 배석하(裵錫夏,1857~1936) 1수, 정지순(鄭之純) 4수, 도석규(都錫珪,1773~1837) 1수, 채귀해(蔡龜海,1850~몰년미상) 1수, 정광재(鄭光材, 1758~1778) 1수, 전이담(全以聃) 1수 등이 있다.

묵헌의 ‘유관어대기(遊觀魚臺記)’에서는 “사수(泗水) 물가에 관어대가 있는데 절벽은 강물에 맞닿아있고, 바위 위의 대(臺)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다. 위에는 하늘이요. 아래로 물덤벙이 펼쳐져 있어 넓은 들과 먼 산의 경치를 손에 거두면 잡을 듯하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리워하고 사모하여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지금까지 오히려 향기가 남아있는 듯하다”고 적혀있다.

1936년에 이수각(李秀珏)이 증보한 ‘칠곡지(漆谷志)’에 게재된 정익동(鄭翊東, 1735~1795) 선비의 ‘관어대(觀魚臺)’ 시를 옮겨보면 “선인들의 업적은 이 물 섶에 자국자국 남아있는데, 자손만대에 전해주실 보배와 같은 금호강이라오. 옆 사람에게 금호강에 대해선 입을 떼지 마세요. 산수 그 자체가 아름답다는 게 대자연의 음악이니까요(千古傳心有寶琴, 傍人莫道瑤絃絶, 山水峨洋是大音.)”로 돼 있다. 또 도석규(都錫珪, 1773~1837)의 작품으로 금호 호수의 푸른 비단 천을 바닥에 깔고, 주변에 병풍을 친 듯이 선경을 그린 ‘서호병십곡(西湖屛十曲)’ 가운데 제9곡에 사수관어대(泗水觀魚臺)가 있다. 즉 “아홉 굽이, 강에 닿았으나 관어대에는 이르지 못했다. 낚싯대에 봄이 낚이고 강물을 거울처럼 마음을 열었네. 실물 물고기를 보고도 관어치지(觀魚致知)에 득도하지 못하니, (한강)선생 가신 후에 찾아온 게 이다지도 한스럽기만 하다니까요(九曲臨江不作臺, 一蒿春水鑑如開. 觀魚不達觀魚理, 最恨先生去後來)?”고 읊었다.

◇한반도에 한민족 성씨가 뿌리를 내리기까지

성(姓, xing)에 대한 ‘설문해자’의 풀이를 보면, “인간의 삶 자체이다(姓是人所生也). 옛날 신성한 어머니가 하늘의 감응을 받아서 자식을 낳았으니, 그를 칭하여 천자(天子)라고 했으며, 여자의 출산으로부터 태어나서 성(生)이라는 발음을 따서 성(姓)이라고 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서도 “천자로 인해서 태어났기에 천자(天子)가 인간에게 성(姓)를 주게 된다(天子因生以賜姓)”고 적고 있다.

동양에서는 이렇게 하늘로부터 그리고 천자로부터 사성(賜姓)이 시작되었다. 성(姓)과 씨(氏)를 구분하는데 “성(姓)은 장소를 기준으로 함이 원칙(姓是本原所生)이고 씨(氏)란 자손들을 구분하는 것이다(氏是子孫下各分).”라고 ‘춘추잡류(春秋雜類)’에 적혀있다. 우리나라 용어로는 성씨관향(姓氏貫鄕)과 파보(派譜)를 말한다. 즉 성(姓)은 천자(天子)만 가졌으며, 한 마디로 천자는 “공적을 세움에 따라 공신들에게 성(姓)을 내려주었다(建德因生以賜姓).”

한반도에 성씨가 도입(姓氏導入)된 기록으로는 i) 한자 및 중국문물과 같이 들어왔고, ii) 나라와 성씨가 동일한 국성(國姓)인 한씨(韓氏)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삼한갑족설(三韓甲族說)이 정설이다. 우리나라 고대기록은 한문으로 작성되었기에 한자와 같이 성씨가 도입되었다.

국성(國姓) 혹은 삼한갑족에 대해서는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의거하면,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청주한씨(淸州韓氏)가 기자의 후손이라고 하는데(世傳淸州 韓氏, 乃箕子之後也)?”에 대해 “마한, 진한, 변한이란 삼한(三韓) 국호가 있었음으로써 한(韓)을 가리켜 기자후손(箕子後孫)이라고 한다.” 이어 “공가(孔哥), 인가(印哥) 및 선우가(鮮于哥)도 다 기자의 후손이다.” 아울러 “옛 시가(古詩歌)에 기자의 후손들은 털북숭이가 많다는데.”라고 선우추(鮮于樞, 1256~1301, 원나라 문신)를 지명하는 기록이 있다.

물론 ‘청주한씨 세보(淸州韓氏世譜)’에 따르면 기자조선(箕子朝鮮)의 후예 마한(馬韓) 9대 원왕(元王)의 세 아들 즉 우성(友誠), 우량(友諒) 및 우평(友平)이 기씨(奇氏), 한씨(韓氏) 및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 그러나 선계(先系)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한란(韓蘭)을 시조로 삼고 있다.

여기서 한민족식(韓民族式)은 복성(複姓)이고 중국은 단성(單姓)이란 특성이 있다. 중국에서 여씨(呂氏 혹은 余氏)가 백제에선 부여(夫餘), 흑치(黑齒) 및 사택(沙宅) 등으로 두글자가 되고, 고구려의 을지(乙支), 연개(淵蓋), 명림(明臨), 대실(大室), 그리고 신라에서는 거칠부(居柒夫), 이사부(異斯夫),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으로 나타났다.

이런 성씨제(姓氏制)가 일본에도 전파되어 복성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신라 왕족부터 김(金)씨, 발해는 대(大)씨 등으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이후 한민족식(土着式) 복성은 사라지고 단성화되었다. 후삼국시대에 와서는 신라 혹은 발해의 귀족층을 제외하고 고려, 후백제의 귀족이나 유력한 호족층에서도 아예 성씨 없이 고유명칭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고려 이전에는 왕족이나 귀족의 전유물(專有物)로 성씨가 정착되었다. 이렇게 단성화된 것을 좋게 표현하면 ‘당나라의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 이지만 사실 사대주의(事大主義) 발상에서 ‘만사 따라쟁이(all follower)’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의도적으로 성씨를 줄여 중국식 단성으로 표기했다.
 

 
권택성<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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