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대신할 수 없는 예술 작품 의미 찾아”…갤러리 CNK 최선 개인전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예술 작품 의미 찾아”…갤러리 CNK 최선 개인전
  • 황인옥
  • 승인 2023.11.0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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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친 그림’은 그릴 수 없단 AI
거기서부터 ‘작가의 일’ 깨달아
천 위에 물 부어 반복적 선 긋기
신작 색면추상 ‘젖은 그림’ 탄생
한국전쟁 담은 ‘7월’ 시리즈도
자살률 1위·구제역 파동 등
작품 통해 사회적 문제 언급
"예술가는 진실 공유해야"
최선 작가
최선 작가가 갤러리 CNK에 걸린 작품 ‘젖은 회화’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황인옥기자

아름답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대개는 시각적으로 뛰어난 조형미를 가졌거나 숭고한 가치를 지녔을 때, 사람들을 ‘아름답다’며 추앙한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시각적이나 가치적인 기준에 적용한 결과다. 작가 최선의 작업 기반은 “무엇이 아름다움을 결정짓는가?”에 맞춰져 왔다. ‘아름다움’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고정관념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의미적인 확장을 시도한다. 이를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돼지의 기름이나 씹다 뱉은 껌, 쓰고 버린 폐수, 작가의 피 등 회화의 재료로 삼기에 혐오스러운 대상을 미술재료로 활용하며 회화의 확장을 모색해 온 그의 행보들은 그야말로 아름다움과의 사투였고, 미학적 실천이었다.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피는 지평을 넓히고, 자유를 제공합니다.”

최선 작가의 개인전이 갤러리 CNK에서 한창이다. 신작 ‘젖은 그림’과 ‘7월’ 시리즈 등 30여점을 걸었다. 색면추상같은 ‘젖은 그림’ 시리즈는 인공지능(AI)이 예술의 영역을 침범하는 현실에서 미술과 예술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탄생했다. 미술과 미술적인 방법의 혁명적인 변화 속에서 바라본 예술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작품에는 누구라도 작가가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작품으로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는 철학이 녹아있다.

“AI에게 ‘망친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런 그림은 그릴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데이터가 없었던 거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조금 다른 각도의 그림인 ‘젖은 그림’이 시작됐어요.” 결국 ‘젖은 그림’은 인공지능으로 대신할 수 없는 예술작품의 의미와 미적 가치에 대한 고민이었다.

‘젖은 그림’에서 흥미로운 점은 작업 방식이다. 천과 종이 위에 물을 부어 젖게 한 후, 물감가루를 묻힌 붓으로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발색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된다. 물로 흥건해진 표면이 물감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색은 미세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지만, 수많은 반복적인 선긋기로 조금씩 발색이 된다. “사라지고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가가는 인간의 시간을 상징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젖은 그림’은 선의 중첩으로 완결된다. 그는 마치 동양화의 난초를 그리듯, 젖은 종이나 캔버스에 선을 올린다. 이는 형식과 내용 양단에서 한국현대미술을 정립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서양인들이 쉽게 알 수 없는, 우리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한국현대미술을 추구해왔다. “제가 대학 다닐 때 흰색을 칠해놓고 환원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한국모더니즘 회화라는 거였죠. 이미 흰색 이면에 다양한 행위들이 중첩됐는데 어떻게 환원일 수 있냐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정체성 찾기를 시작했어요.”

전시작 ‘7월’ 시리즈는 경부선 열차로 이동하던 중 영동역을 지날 때 본 마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수려한 풍경과 향기로운 포도 과수원이 아름다운 마을이었는데, 마을 근처 굴다리에서 한국전쟁 중에 양민학살이 자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름다운 풍경 이면에 숨겨진 비극적인 사건을 알게 됐다. 굴다리 표면에는 아직도 총탄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그는 그 총탄 자국을 지도의 좌표처럼 캔버스에 옮겼다.

젖은회화 Wet Painting
최선 작 ‘젖은 회화(Wet Painting)’
갤러리 CNK 제공

“학살 때 생긴 총탄 흔적이 긴 세월을 거치며 아름다운 벽화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분명 참혹한 전쟁의 흔적이었어요. 아직도 지구촌에는 예기치 못한 불행한 일이 끝없이 일어나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어 안타까워요.”

그의 작업이 갖는 특징은 명료하다. 바로 회화와 세상을 대하는 진지하고 혁신적인 태도다. 그는 무심하게 지나치는 대상들에 특유의 문제의식을 발동하고, 변화의 단초를 찾는다. 보이는 현상보다 그 이면에 자리한 진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미술적인 행위로 세상과 공유하려 노력한다. “진실을 찾아 함께 공유하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이번 전시작 못지않게 전작들에서도 세상을 진실되게 바라보려는 그의 태도들이 발견된다. 빨강과 파랑, 두 색의 교집합으로 생긴 보라, 그리고 군복의 위장 무늬 형태의 선의 형상으로 표현한 작품 ‘멀미’에선 극단적인 이념 논쟁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의 대립적인 상황을 서술했다.

일반인들이 잉크에 숨을 불어넣어 완성한 또 다른 작품 ‘나비’에선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속에 숨겨진 우리사회의 생명 경시 풍조를 비판했고, 2010~2011년 발생한 구제역 파동에 살처분 된 332만 마리의 돼지 번호를 하나하나 잉크로 새긴 작품 ‘자홍색 회화’와 돼지기름으로 그린 작품 ‘흰그림’은 생명체인 돼지를 병원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구제역 파동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는 미술을 고정된 틀을 반복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도구로 인식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미의식으로 확장해가는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방향성에 따라 통념을 뛰어넘는 재료와 작업방식들을 미술에 접목하며 “어디까지 미술이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이어왔다. 이런 문제의식을 환경문제나 생명경시풍조, 이념적인 대립 등의 사회문제들과 연결시켰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역할과 예술가의 역할을 동시에 추구한 것.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미술대학을 다니던 시기부터 발아됐다. 당시 그의 선배나 스승들은 서양에서 이식된 현대미술과 한국현대미술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회화의 조건이 사각틀이라는 인식보다 그런 고정적인 틀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조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추구하게 됐어요. 그 자유는 서양이 아닌 우리의 재료와 방식으로 진행하려 했죠.”

“미술이 무엇이고, 그림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사회적인 문제와 결부되며 깊이를 더해갔다. “조금 다른 각도의 그림”에 대한 목마름을 혁신적인 실천으로 치환됐다. 고정 관념으로부터의 자유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재료와 형식의 파괴로 드러났다. 김칫국물이나 항암제로 물감이 표현하지 못하는 기운을 드러내고, 조명 아래 자신의 피가 굳어가는 모습은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길에서 작가가 갖춰야 할 덕목은 열린 태도다. 그는 다행히 유랑자적 DNA를 타고난 사람처럼 보인다. 한 곳에 머물기보다 전국을 떠돌며 작업하고 전시하는 것을 즐긴다. “유랑적인 태도의 이면에 더 많은 것을 경험”하기 위한 이유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그에게 진리처럼 다가온다. 앎의 지층이 깊고 단단할수록 사고도 틀도 자유로워진다는 믿음이 있었고, 더 많이 경험하고 세상을 더 많이 알기 위해 유랑했다.

“같은 바닷가라도 부산과 부안의 가치관이나 삶의 형태가 다릅니다. 세상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 모든 것들을 알아야 했어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찾기는 지구촌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잉크로 일반 대중들의 숨을 불어넣은 작품 ‘나비’는 국내에서 해외로 참여자들이 확장된 것. 서울 탑골공원의 노인, 대구 예술발전소를 찾은 젊은이들, 그리고 프랑스 파리를 찾은 관광객 등이 작품 ‘나비’에 숨을 불어넣었다. 최선 작가의 ‘Illusion of an illusion’전은 갤러리 CNK에서 12월 6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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