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인문학] 한계와 결핍이 보내준 뜻밖의 선물
[치유의 인문학] 한계와 결핍이 보내준 뜻밖의 선물
  • 승인 2023.11.02 21:2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성삼 대구한의대 교수
한계와 결핍, 그리고 열등감은 인간계에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용어다. 하지만 심리학계에선 이 단어들이 가끔 신의 축복과 선물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엄청난 역설이다. 삶에서 역설은 반전이고 희망이다.

돌이켜보면 결핍이 많았던 어린 시절 필자는 살림이 넉넉한 친구들의 도시락과 비싼 옷들을 부러워했다. 성장하면서는 부모로부터 든든한 경제적 후원을 받는 친구들을 또 부러워했다. 그들은 항상 나보다 한 걸음 앞섰고 많은 여유자금을 가지고 출발했고 더 큰 규모로 사업을 시작했다. 삶에 지칠 때 필자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 앞에서 나의 호주머니는 가벼웠고 빈약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래를 설계할 때 나는 내일의 생활과 미래를 동시에 걱정했다. 내 걱정의 무게가 그들보다 항상 1그램 더 무거웠다. 그 시절 내 영혼과 몸은 항상 추웠고 한계와 결핍, 그리고 열등감은 내 감정과 기분의 전부였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두어 걸음 앞서는 게 얼마나 큰 이득인지 모른다. 달려보면 안다. 계단 오르기의 특훈으로 다리근육을 키우고,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며 순간 스피드를 올리는 피나는 연습으로 내가 비로써 두어 걸음 앞선 선수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쾌감과 기분은 역전의 승리를 맛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이었고 남모르는 땀을 흘려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신의 선물이었다.

다행인건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신은 오만과 방심이라는 함정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카루스의 추락 이야기는 자가당착을 경계하라는 신의 준엄한 경고다. 그걸 알아버린 순간 세상이 처음으로 공평하다 느꼈고 신에게 감사했다. 모든 것을 다가진자에게 겸손을 명령하고 이타심을 요구한 신의 명령은 자연의 균형을 맞추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배려라는 사실에 고마웠다.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전사의 몸을 가진 필자가 포도주 명인과 우연히 대담을 나누게 되었다. 무식이 용감이라고 명인에게 직선으로 물었다.

"어떤 포도주가 좋은 포도주입니까?"

한참 뜸을 들인 후 의미 있는 말을 무심하게 '툭~' 던졌다.

"명품 포도주는 좋은 땅과 기후, 그리고 많은 거름이 필요할 것 같지만 오히려 척박한 환경과 기후가 명품 포도주를 만드는 최고의 요건입니다"

상식의 틀을 깬 예상 밖의 답변이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그의 답변이 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던 이유는 시련이 명품을 만든다는 소박한 진리도 있었지만 그 말이 나를 위로하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감동은 힘이 있다.

필자의 노트북 화면에는 오랫동안 바탕화면이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일명 '무릎 꿇은 나무'라는 사진그림이다.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마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수도하는 모습으로 몸을 틀고 있는 사진인데 노트북을 켤 때마다 감동을 받는다. 때론 수많은 문장보다도 한 장의 사진이 더 큰 힘을 가질 때가 있다. 의식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문장보다 말의 힘이 강하고 말보다 음악의 힘이 강하고 음악보다 한 장의 사진의 힘이 더 강할 때가 있다. 그 한 장의 사진은 그렇게 늘 나의 의식을 깨웠다.

그 나무 사진은 로키산맥 해발 3,000미터 고지에서 유일하게 생존하는 나무다. 사진 속 나무는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게 했고 수많은 생각을 만들어냈다. 해발 3,000미터는 일반적으로 '수목한계선'이라고 해서 식물이 생존하기에 어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백두산의 높이가 2,744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백두산 정상에는 나무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높이에서 나무가 생존할 수 있었지? 그리고 왜 나무가 무릎을 꿇은 것처럼 휘었지? 엄청난 바람과 부족한 물로 어떻게 나무는 생존할 수 있었지? 오랜 생각은 나무의 인격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로키산맥의 나무도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죽을 것인가? 생존할 것인가? 만약 생존을 선택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고행을 선택한 수도승처럼 그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수만 번을 묻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람에 맞서지 말자. 물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자. 바람에 맞설 수 있는 줄기의 힘을 가질 때까지 인내하고 견뎌내자.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수행자처럼 보낸 시간이 백년이 넘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바람에 맞설 수 있는 시간이 왔다. 바람에 맞서 흔들리지 않는 굵기의 목대가 되었고 웬만한 가뭄에도 견딜 수 있는 길고 단단한 뿌리도 만들었다. 바로 그때, 무릎 꿇은 나무는 허리를 곧게 펴고 수직으로 빛을 향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무도 살지 못하는 그곳, 아니 생존할 수 없는 그곳에서 무릎 꿇은 나무는 '무외無畏(두려움 없이 당당하다)'의 정신으로 자신의 존재를 조용히 세상에 알렸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이 바로 이곳 무릎 꿇은 나무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결핍의 스토리다.

자연은 우리에게 한계와 결핍에서 신의 위대한 선물을 발견하라고 말한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