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배산임수’ 택리 기준 따라 산기슭 아래 집성촌 형성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배산임수’ 택리 기준 따라 산기슭 아래 집성촌 형성
  • 김종현
  • 승인 2023.11.1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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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금호강섶 집성촌(성씨의 고향)을 이루기까지
세종실록지리지 대구 집성현상
대구군 호수 436호·인구 1천329명
대구본군 4본 토착성씨 白·裵·徐·李
타지서 들어온 성씨는 유일하게 都
중앙에서 공로에 따라 ‘관향’을 하사
사성책봉 통해 할애한 지역에 집성촌
세종지리지대구
세종지리지 대구토성 분포도. 그림 이대영

◇금호강 섶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집성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성씨 통계자료를 공식적으로 간행한 건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를 시발점으로 1481년 동국여지승람,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있다.

‘배산임수’의 택리 기준에 따라 팔공산, 비슬산 등 산기슭 아래에 금호강 혹은 신천 물섶에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대구의 집성현상을: i) 경주도호부 대구군, 수성현 및 하빈현(달성군 다사하빈), 해안현, 현풍현과 ii) 성주목의 화원현, 팔거현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세종실록지리지를 기준으로 민가호수와 인구수를 짐작해보면, 대구군 호수(戶數)는 436호, 인구는 1천329명이며, 수성현은 264호에 인구 644명, 하빈현은 351호 인구 1천249명, 해안현 호수 198호 인구 1천203명, 화원현 호수 321호 인구 1천361명, 팔거현 호수 347호 인구 1천481명이었다. 현풍현은 호수 477호, 인구 1천871명으로 주변에서는 강력했던 것은 신라10정 가운데 제3삼량벌정이 들어섰던 대가야정벌기지였다.

인구변동 상황을 보면, 과거 신라시대 경덕왕 이후 수창군과 고려시대 수성군 관아가 있었던 수성현의 인구수는 대구현의 절반으로 줄었다. 신라 초기엔 위화군 또는 상촌창군(上村昌郡)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수창군으로 바뀌었으며, 가창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고려 초에 수성군으로 바뀌었고, 1018년(현종 9)에 수성군사(壽城郡司)로서 경주에 속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해안현(解顔縣)을 겸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1394년(태조 3)에 대구겸관으로 삼았다가 1414년(태종 14)에 다시 대구에 합속되었으며, 1419년에 수성현사(水城縣司)로 대구임내(大邱任內)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대구군보다 팔거현의 인구가 더 많았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팔거현에 명나라 지원군 가운데 유정(劉綎) 부대 1만3천여 명이 팔거현(매천초등학교 인근)에 주둔하고, 이를 지원하고자 경상감영(1593~1596)이 들어섬으로 2만5천명의 군사상업도시로 번창했다. 이어 1640년에 칠곡도호부(인구 3만여 명)로 승격하여 가산도호부시대를 열었다.

대구본군은 4본의 토착성씨는 백(白), 배(裵), 서(徐) 및 이(李)씨이었다. 타지에서 들어온 성씨는 유일하게 도(都)씨였다. 수성현 토착성씨는 빈(賓), 나(羅), 조(曺) 및 혜씨가 있었고, 들어온 성씨로는 7본으로 유(柳), 장(張), 최(崔), 신(申), 유(劉), 고(高) 그리고 정(鄭)씨가 있었다. 이전에 빠졌던 성씨(續姓)로는 6본으로 예(芮 : 缶溪에서 왔음), 진(陳: 桂城에서 왔음), 최(崔 : 保寧에서 왔음)씨이고, 김(金)씨는 둘이었는데 하나는 김해(金海)와 다른 하나는 청도(靑道)에서 왔다. 이(李)씨는 본관은 알지 못 하나 모두 향리가 되었다. 하빈현에선 3본으로 신(申), 이(李) 그리고 송(宋)씨가 있었다. 해안현은 토착성씨로 5본으로 모(牟), 백(白), 하(河), 신(申) 및 정(丁)씨가 이었고, 내성(來姓)으로 3본 제(諸), 진(秦) 및 박(朴)씨었고, 속성(續姓)으로 한(韓)씨 하나가 있었다. 해안에서 20리 떨어진 자이소(資已所)에는 속성인 김(金)씨 하나만 있었다.

◇금호강변 집성촌의 변천동향

세종실록지리지와 1899년 ‘대구부읍지’의 기록을 대조(비교)하면, 대구읍지의 대구도호부에서는 백(白), 하(夏), 배(裵), 서(徐) 및 이(李)씨가 거주하고, 도(都)씨는 외지에서 들어온 성씨였다. 하빈현에는 신(申), 이(李) 및 송(宋)씨가 거주했고, 수성현엔 빈(賓),나(羅),조(曺), 혜씨가 거주했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1370년 고려말 김지(金祉)가 편찬한 류서(類書)였던 ‘주관육익(周官六翼)’ 분류체계를 원용하여 성씨와 성벽을 연계시켜 수성현과 해안현의 성씨를 설명했다.

즉 “수성현에는 i) 수대군(壽大郡)으로 양성(壤城)이라고 하였으며 그 성씨는 빈(賓)씨였다. ii) 구성(具城)으로 그 성씨는 나(羅)씨였고, iii) 잉조이성(仍助伊城)으로 성씨는 조(曺)와 혜씨였다. 이외 류(柳), 장(張), 최(崔), 신(申), 유(劉), 고(高), 정(鄭), 예(芮), 진(陳), 김(金) 및 이(李)씨 모두가 외지에서 들어 왔다. 해안현에서 모(牟), 백(白), 하(河), 신(申) 및 정(鄭)씨가 거주해왔다. 주관육익에 또 이르기를 성화성(省火城)에는 모(牟)씨, 무가성(無價城)에는 신(申)씨, 불좌성(佛坐城)에 백(白)씨, 하명성(河鳴城)에 정(丁)씨가 거주했다. 제(諸), 진(秦). 박(朴)씨도 모두 외지에서 들어왔다. 한(韓)씨도 거주하였는데 속성이었다. 자이소(資已所)에선 김(金)씨가 거주한 속성이었다. 이외에는 모두 외지에서 들어온 성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언급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한편,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 1467~1498)의 증손자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는 1584(선조17)년에 대구부사에 부임하여 1589년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서에서 간추린 i) 지리, 국호, 성씨, 인명, 효자, 열녀, 수령, 선명(仙名), 목명(木名), 화명(花名) 및 금명(禽名) 등, ii) 정형한시의 운자(韻字) 즉 평성(平聲) 30운, 상성(上聲) 29운, 거성(去聲) 30운, 입성(入聲) 17운 등 106개의 운자순(韻字順)으로 분류하여 편집한 백과사전으로 20권 20책을 편찬했다. iii)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란 이름으로 주옥같은 내용을 선별 편집함에 있어, iv) 인용문헌으로는 중국서 사기 등을 비롯한 15종과 우리나라 서적 175종을 저자까지 올려놓았다.

대동운부군옥 인명에서 “빈우광(賓宇光)은 수성현 사람이며, 그는 과거에 좋은 성적으로 급제하고, 또한 원나라의 과거에도 급제하였다. 벼슬은 한림이었으나, 출세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산수 간에 스스로 즐겼고, 당시 필치가 뛰어났다”고 적고 있으나, 빈씨세보(賓氏世譜) 수성빈씨(壽城賓氏)에서는 시조 빈우광은 송나라 한림학사로 송이 멸망하자 비각에 소장한 서적 일만칠천 권을 갖고 고려에 귀화해 학풍 진작에 힘써 충숙왕(忠肅王) 때 수성군에 책봉되었고, 수성부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고 했다.

이같이 중앙에서 지역을 다스리게 ‘봉군지’로 식읍을 주거나, 공로에 따라 관향(성씨)을 갖도록 특정 지역을 하사받는 ‘사관지(賜貫地)’ 등으로 중앙관리를 대신했으며, 이를 통해서 성씨 시조가 생겨났다. 사성책봉을 통해 할애해준 지역에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또한 성씨의 개관(改貫), 개변(改變)도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모화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아 주(朱)씨는 신안(新安, 安徽省 新安)으로, 공(孔)씨는 곡부(曲阜, 山東省 曲阜)로, 그리고 천(千)씨는 영향(穎陽, 河南省 潁川) 등 중국 관향을 사용했다. 춘원 이광수의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라는 당당한 친일애국 창씨개명도 있었다.

외국에서 귀화한 성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277개의 성씨 가운데 130여 개 외래 귀화성씨였다. 대부분은 중국(한족)계를 시조로 두고 있었다. 고서지와 족보의 교차검증이 어렵기에 생물학적 계보가 아닌 문화적 계보로 봐야 한다. 대표적인 귀화성씨로는 위구르계 덕수장씨 및 경주설씨, 베트남계 화산이씨, 인도계 허황옥에게 연원을 둔 김해허씨, 일본계 임진왜란 때 왜장에서 귀화한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의 김해김씨(金海金氏) 등이 있다.
 

 
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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