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십일월
[달구벌아침] 십일월
  • 승인 2023.11.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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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나뭇잎들을 모두 떨구고 나니 그제야 나무의 속살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여탕이든 남탕이든 목욕탕에 들어선 나신의 그들처럼, 가지와 가지사이 들앉은 새집의 풍경이 보이고 가려진 구름이 보인다. 구름을 걷어내니 비켜선 말간 하늘이 들여다보이듯 사람의 속내도 마찬가지 아닐까. 다 내려놓고 속을 꺼내 보여주거나 말해야 눈물이든 웃음이든 제대로 된 무게를 잴 수 있지 않을까. 오래 묵은 때를 밀어내려면 비누와 때수건이 필요하듯 보고 듣고 말하지 않고 눈빛만으로도 알아채기엔 그만큼의 시간과 거리가 필요할 성싶다.
꿈과 현실 사이처럼 일 년 열두 달 중 이월과 십일월은 어딘지 불안정하고 중간에 끼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호흡이 가빠진다. 이월은 새로 시작하는 일월과 삼월 사이 준비를 위해 쓰이고 십일월은 완연한 가을과 겨울 사이 무정차 역이나 발길이 끊어진 폐역처럼 빠르게 스쳐 가기 때문 아닐까. 나무와 가지 사이, 대기와 공기사이, 시간과 공간 사이, 하늘과 땅 사이 가쁜 숨이 들어찬다. 일과 일 사이 끼인 공백처럼 이 두 달은 왠지 모를 당혹감과 처연함이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영문학자 정은귀 교수는 서울시민대학의 '아메리카 인디언 시 강좌' 시간에서 학생들과 함께 '열두 달의 이름 짓기'를 한 적이 있다. 그중 십일월을 없는 듯 있는 달, 꽃은 가도 나무는 남아있는 달, 세탁소가 바쁜 달, 무 배추 뽑는 달, 낙엽달력이 한 장 남은 달 등이라 지었다 한다. 늘 사랑과 관심이 고픈 아이에게 불끈 힘을 쥐여 주듯 나와 너, 우리 모두 각각의 십일월에 마침 한 새 이름을 붙여준다면 어떨까. 버려야 채워지는 달, 절망 뒤에 찾아든 희망을 꿈꾸는 달, 뜨거운 커피잔을 움켜쥔 손바닥처럼 너와 내가 우리 안에 스며드는 달, 삶이 노래가 되어 깊이 젖어 드는 달 같은 그런 이름을. 마음 나눌 누군가가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계절,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친구가 더없이 생각나는 십일월이다.
세르반테스는 '사람은 친구와 한 숟가락의 소금을 나누어 먹었을 때 비로소 친구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나이 사이사이 시간의 더께가 두터워질수록 무거운 눈을 이기지 못해 부러지고 마는 생가지처럼 어느 순간 우린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몸도 열정도 역부족이다.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며 밤새 안녕이라더니 지난밤, 소리 소문 없이 눈이 왔다 갔다며 소식을 보냈다. 그 덕에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두었던 미주알고주알, 반나절 이상 풀어놓고 보니 곧장 달려가 부둥켜안고 꼭 껴안아 주고 싶은 맘이 간절하게 들었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수 있는 거리 어디쯤,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이던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되듯, 십일월은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달이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지나 같은 추억을 공유하며 같이 늙어간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함께 나눈다. 한 그루 나무와 나무처럼 얼굴 맞대고 나란히 선 채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어 가며 나뭇잎을 떨구어 낸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십일월처럼 우린 세상이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선 뿌리 깊은 한 그루 나무다.
기쁨과 슬픔의 무게를 서로 더 무겁다, 지배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오르막은 밀어주고 내리막은 당겨주며 젓가락처럼 똑같이 나눠 갖는다. 밀어내거나 당기지 않고 감정의 무게를 재려 들지도 않는다. 다만 흐르는 데로 세상 속으로 흘러간다. 주어진 세계 안에서 뭉치거나 흩어져 비가 되어 내리거나 눈이 되어 내리는 구름처럼 살아간다. 서로서로 판단하거나 뜻대로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멀지도 가깝지 않게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어깨 나란히 마주한 수평선이며 또한 지평선이다. 우린 서로서로의 삶을 비춰주고 반추하는 거울이며 두터운 유리 한 장, 사이에 둔 어항 속 물고기다.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져 내린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뛰어내린 낙엽들로 인해 소란하다. 매달려 있던 곳을 박차고 뛰어내리려면 그들에게도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런 까닭으로 그들은 충분히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설혹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삶이라 해도 걱정 근심 모두 내려놓고 인생 2막의 도화지엔 회귀하는 연어처럼 바닥을 치고 다시 차오를 봄을 그렸으면 좋겠다.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제 맛이 나고, 그런 겨울의 모진 추위를 이겨내고서야 다가오는 봄의 생명력이 더욱 충만해질 거라는 응원을 더 해 남은 십일월과 함께 친구에게 띄워 보낸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 내 삶이 더 풍부해졌는지를 느끼게 해 준 십일월이 진한 국화향기 배어 든 갈피끈이 되어 그녀와 함께 동행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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