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고려의 중흥조 현종과 고려거란전쟁
[류동학의 세상읽기] 고려의 중흥조 현종과 고려거란전쟁
  • 승인 2023.11.2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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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한국사에서 중흥의 시기는 5세기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고구려, 8∼9세기 남북조시대의 신라의 성덕왕과 경덕왕과 발해의 문왕과 선왕,11세기의 현종과 문종(재위:1046년∼1083년), 15세기 세종,성종, 18세기 영조와 정조시기이다. 그러고 21세기 대한민국이다. 이것이 300년 주기설이다. 현재의 역사적인 시대적인 과업은 남북평화통일과 명실상부한 세계 10대 강국으로의 도약이다.

우리나라에서 군사강국은 고구려와 고려를 들 수 있다. 특히 고려(918∼1392)는 외침이 많았던 시기로 군사적으로 명장들과 뛰어난 외교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0세기의 유금필, 서희, 11세기의 양규,김숙흥,하공진,강감찬과 강민첨, 12세기의 윤관과 척준경, 13세기의 거란을 격퇴한 김취려와 몽고를 격퇴한 귀주성 전투의 박서,김경손,처인성전투의 김윤후, 14세기의 황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이성계와 최영 등의 명장들이다. 고려는 크게 경인년(庚寅年) 1170년 정중부난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분류한다.

993년(성종 12년)부터 1019년(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27년간 세 차례에 걸쳐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전쟁인 여요전쟁(麗遼戰爭)은 결과적으로 한국사의 3대 대첩(살수,귀주,한산)인 귀주대첩의 승리로 귀결되어 이후 고려, 송,요가 무려 100여 년간 둥북아의 평화를 불려와 고려의 황금기(완성기 문종, 숙종, 예종)의 기반이 되었다.

현재의 한반도의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한국,미국,일본과의 동맹과 북한, 중국, 러시아와의 동맹강화로 더욱 더 외교전과 국방력의 강화가 요구되는 점에서 이 시기의 동북아의 역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려의 세종이라 불리는 현종(顯宗, 992∼1031)은 근친혼이 유행하던 고려 왕실에서 태조의 아들인 안종(安宗) 왕욱(王郁)과 경종의 부인이자 대종 왕욱의 따님인 헌정왕후 황보씨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안종 왕욱(?∼996)은 태조 왕건과 신라 경순왕의 사촌누이인 신성왕후의 아들이다. 헌정왕후의 아버지 대종(戴宗, ?~969) 왕욱((王旭)은 태조와 신정왕후의 아들로 안종 왕욱의 이복 형이고, 헌정왕후는 안종의 이복조카딸이다. 또한 헌정왕후는 먼저 사촌오빠인 광종의 아들인 경종(재위: 975년∼981년)와 결혼하였다.

사생아로 태어난 현종은 부친이 있는 경남 사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이모인 헌애왕후(천추태후, 964∼1029)에 의해 신혈사(현 진관사)에서 암살위기를 극복하고 1009년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을 추대하는데 반대하여 일어난 강조의 정변에 의해서 즉위했다. 강조는 김치양 부자와 목종을 죽이고 천추태후를 귀양보냈다. 강조의 정변은 거란 최고인 군주이자 소태후(953∼1009)의 아들인 야율융서 성종(聖宗,재위982년∼1031년)이 40만 대군으로 11월에 쳐들어온 원인이 된다.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와 지채문의 호위로 나주로 몽진가면서 온갖 수모를 경험하게 된다. 현종의 몽진은 공민왕의 안동몽진과 선조의 의주몽진, 인조의 공주와 남한산성의 몽진에 비해 가장 비참한 몽진으로 기록된다. 이런 와중에 현종(재위1009∼1031)은 공주에서 김은부의 도움으로 김은부의 3녀를 모두 왕비로 맞이한다. 즉 9대 덕종과 10대 정종인 모후인 원성왕후 김씨, 11대 문종의 모후인 원혜왕후와 원평왕후이다.

그 당시 거란(907∼1125)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연운16주(현 허베이성 산시성)를 차지한 중국최초의 정복왕조로 서하(닝샤 후이족 자치구)와 여진을 복속하고 1004년 북송 진종과 구준과 전연(허난성 푸양시)의 맹약을 체결하고 고려를 침입했다. 거란과의 2차전쟁에서 강조의 30만 대군은 통주(평북 선천군)전투에서 대패했으나 흥화진의 양규와 귀주의 김숙흥은 게릴라 전술로 승리를 하여 고려의 자긍심을 높였다.

현종〔992년(성종 11)~1031년(현종 22)〕이 조선의 선조나 인조보다 더 훌륭한 고려의 세종으로 평가받는 군주인 점은 1018년 고려거란 3차전쟁이 오기 전부터 착실하게 준비해온 점이다, 그 결과 소배압의 10만 기병의 침입을 귀주에서 강감찬과 강민첨,김종현이 크게 물리치고 도리어 다음해 거란이 외교사절을 파견함 점이다. 이후 개경의 23km에 달하는 나성을 축조하고 감목양마법, 면군급고법(군역면제),구분전(군인 유가족)지급을 제정하고 여진족을 격퇴하여 국방력을 크게 강화한 점이다.

또한 고려실록을 재편찬하고, 초조대장경(대구 부인사 보간중 몽고칩입때 소실)을 간행하였으며 황룡사의 중건과 교종 대사찰인 현화사 건립과, 성종 이후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유교의 진흥에도 힘써 설총과 최치원을 문묘(文廟)에 처음으로 종사하게 하였다. 1024년에는 개경을 확장하고 중앙에 국방회의 기구인 도병마사설치와 지방행정을 5도양계와 3경 4도호부 8목과 경기(京畿)제로 개편했다. 주현공거법(향리자제 과거응시)과 조세의 균등을 기하고 주창수렴법(의창제)을 실시했다.

현종은 탄생부터 즉위까지 무수한 고난에도 동아시아 최대의 강국인 거란의 1010년과 1018년의 공격을 극복하고 내치와 외치 등 다방면의 활약으로 화려한 문화황금기인 문벌귀족사회를 열었다. 또한 현종은 7왕후 6비에게서 5남8녀를 얻어 아들인 덕종, 정종, 문종이 모두 왕으로 즉위하고 손자이자 문종의 아들인 순종, 선종, 숙종이 모두 왕으로 즉위하여 후손들이 모두 멸망할 때까지 현종의 직계로만 왕의 자리를 이어가게 하여 왕실을 튼튼하게 했다.

현종이 붕어한 1031년에 강감찬과 거란 성종도 삶을 마감하게 된다. 동아시아를 주도했던 3명이 한해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현종은 현대에도 귀감이 되는 지도자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기원한다. 윤정부는 후세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가 판가름 나는 여야의 대회전이 2024년 4월의 총선이다. 대한민국의 운명의 한판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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