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 창당을 외치며 부지런을 떠는 국민의힘 전 당대표 이준석을 보는 국민의 마음은 착잡하다. “왜 저럴까?” 그를 아끼는 안타까운 시각이다. 세상을 보는 긴 안목이 필요한데 성급하다. 한마디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삼라만상은 순리로 흐른다. 지식과 꾀가 아무리 많다한들 강물을 역류시킬 순 없다. 정치도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농사를 지어보면 자연의 이치에 감동할 때가 많다. 씨앗을 파종하는 시기가 있는데 욕심을 내어 미리 심으면 웃자라거나 냉해, 병충해로 피해를 입기 십상이다.
민생이 어렵다. 학자금을 마련 못해 전전긍긍하는 서민들도 많다. 환경이 열악해서 꿈을 펼치는데 어려움이 많은 청소년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인이 드물다. 국민은 일류인데 ‘4류 정치인’ 때문에 오는 폐해도 크다. 청년 정치인 이준석에게 거는 기대가 큰 이유였다.
그런데 이준석은 어떤가? 서울과학고와 세계적인 명문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이었던 유승민 전 원내대표와 경북고, 서울대 동창생으로 막역한 친구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세계에 이만한 입지를 가지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12년 전, 첫 등판부터 화려했다. 차기 유력한 대통령후보였던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비대위원으로 발탁하였고, 일약 정치스타로 떠올랐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박근혜 비대위는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300석 중 과반을 넘는 152석을 얻어 민주통합당 127석보다 25석을 더 확보했다. 뒤이어 그해 12월,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이준석의 정치행로에 날개가 달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발탁해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 유승민의원 등과 뜻을 같이 했다. 그리고 정치 입문 딱 10년 만인 2021년 6월, 36세의 나이로 국민의힘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정치판이 발칵 뒤집혔고, 국민들은 환호했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남긴 “정치는 4류”가 불식 될 수 있을까하는 기대치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성접대 의혹 파문으로 ‘당원권정지’라는 징계를 받고,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사건은 공소시효가 지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면 공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요한 혁신위가 대사면을 건의하여 징계가 취소되었다. 다소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도 자신의 탄핵에 비서실장이었던 유승민의원과 청년 발탁 1호인 이준석 전 대표가 앞장섰으니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이 또한 흘러간 역사의 강물인 것을.
지금 시점에서 이준석 전 대표를 안타까운 시각으로 보는 것은 그가 아직 38세의 청년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자중자애(自重自愛)했더라면 큰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오만의 마(魔)를 떨치기 어려운 것 같다. 부디 송나라 학자 정이의 인생삼불행(人生三不幸)의 첫째가 ‘소년등과(少年登科 ; 일찍 출세하는 것)’라는 지적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조선 500년 역사에 2명의 ‘소년등과’ 사례가 귀감이 될 것 같다. 세조의 종친인 남이장군은 26세에 병조판서를 지내고, 27세에 사약을 받았다. 세조 동생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인 이준 역시 27세에 영의정에 올랐다. 예종이 일찍(1년) 죽고, 성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어린 왕보다 영의정을 거친 경험이 풍부한 이준이 더 낫지 않은가’ 하는 풍문이 돌았다. 그도 역모를 꾀했다는 상소 한 장에 귀양길에 올랐고, 38세에 사망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의 쓴맛을 경험하지 않고, 벼락출세함으로써 주위를 살피지 않고 교만함이 앞선 대가가 아니었을까?
이 전 대표에게 남을 탓하기에 앞서 성찰의 시간과 겸손함을 권하고 싶다. 당 대표가 대선기간 중에 속칭 무단가출?을 두 차례나 하여 윤석열 후보가 진땀을 뺐다. 두 번째 회동을 마치고 윤후보와 함께 이동하면서 “자신이 정치는 더 선배라”는 것은 과했다. 자신의 토크콘서트에 온 인 혁신위원장에게 “미스터 린턴”으로 호칭한 것도 지나쳤다. 젊음은 만용이 결코 아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솟구치는 열정이다. 대통령에게 12월 27일까지 국정기조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나라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는 결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준석, 장래가 창창한데 여기서 과연 멈추고 말 것인가.
민생이 어렵다. 학자금을 마련 못해 전전긍긍하는 서민들도 많다. 환경이 열악해서 꿈을 펼치는데 어려움이 많은 청소년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인이 드물다. 국민은 일류인데 ‘4류 정치인’ 때문에 오는 폐해도 크다. 청년 정치인 이준석에게 거는 기대가 큰 이유였다.
그런데 이준석은 어떤가? 서울과학고와 세계적인 명문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이었던 유승민 전 원내대표와 경북고, 서울대 동창생으로 막역한 친구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세계에 이만한 입지를 가지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12년 전, 첫 등판부터 화려했다. 차기 유력한 대통령후보였던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비대위원으로 발탁하였고, 일약 정치스타로 떠올랐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박근혜 비대위는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300석 중 과반을 넘는 152석을 얻어 민주통합당 127석보다 25석을 더 확보했다. 뒤이어 그해 12월,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이준석의 정치행로에 날개가 달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발탁해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 유승민의원 등과 뜻을 같이 했다. 그리고 정치 입문 딱 10년 만인 2021년 6월, 36세의 나이로 국민의힘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정치판이 발칵 뒤집혔고, 국민들은 환호했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남긴 “정치는 4류”가 불식 될 수 있을까하는 기대치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성접대 의혹 파문으로 ‘당원권정지’라는 징계를 받고,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사건은 공소시효가 지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면 공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요한 혁신위가 대사면을 건의하여 징계가 취소되었다. 다소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도 자신의 탄핵에 비서실장이었던 유승민의원과 청년 발탁 1호인 이준석 전 대표가 앞장섰으니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이 또한 흘러간 역사의 강물인 것을.
지금 시점에서 이준석 전 대표를 안타까운 시각으로 보는 것은 그가 아직 38세의 청년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자중자애(自重自愛)했더라면 큰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오만의 마(魔)를 떨치기 어려운 것 같다. 부디 송나라 학자 정이의 인생삼불행(人生三不幸)의 첫째가 ‘소년등과(少年登科 ; 일찍 출세하는 것)’라는 지적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조선 500년 역사에 2명의 ‘소년등과’ 사례가 귀감이 될 것 같다. 세조의 종친인 남이장군은 26세에 병조판서를 지내고, 27세에 사약을 받았다. 세조 동생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인 이준 역시 27세에 영의정에 올랐다. 예종이 일찍(1년) 죽고, 성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어린 왕보다 영의정을 거친 경험이 풍부한 이준이 더 낫지 않은가’ 하는 풍문이 돌았다. 그도 역모를 꾀했다는 상소 한 장에 귀양길에 올랐고, 38세에 사망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의 쓴맛을 경험하지 않고, 벼락출세함으로써 주위를 살피지 않고 교만함이 앞선 대가가 아니었을까?
이 전 대표에게 남을 탓하기에 앞서 성찰의 시간과 겸손함을 권하고 싶다. 당 대표가 대선기간 중에 속칭 무단가출?을 두 차례나 하여 윤석열 후보가 진땀을 뺐다. 두 번째 회동을 마치고 윤후보와 함께 이동하면서 “자신이 정치는 더 선배라”는 것은 과했다. 자신의 토크콘서트에 온 인 혁신위원장에게 “미스터 린턴”으로 호칭한 것도 지나쳤다. 젊음은 만용이 결코 아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솟구치는 열정이다. 대통령에게 12월 27일까지 국정기조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나라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는 결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준석, 장래가 창창한데 여기서 과연 멈추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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