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읽히지 않는 저녁을 지나
[달구벌아침] 읽히지 않는 저녁을 지나
  • 승인 2023.12.0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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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집을 잃은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 잠드는가?
붉은 비상등을 깜빡이며 갓길에 멈춰 선 자동차, 짝 잃은 한 짝의 신발 그리고 벙어리장갑, 호주머니 깊숙이 양 손을 찔러 넣은 채 홀로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멈춰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십이월처럼, 후회와 연민으로 가득 찬 지금의 내 모습만 같아. 그들의 모습에서 지난 어제와 못 다한 꿈, 곁에 있거나 떠나간 사람들의 흔적이 소설의 한 페이지처럼 읽혔다 지워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산지하도를 빠져나올 즈음 중앙분리대에 걸려 덩그러니 놓여있는 신발 한 짝을 만났다.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먼지와 낙엽을 덮어쓴 채 길을 묻듯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어쩌다 잃어버린 것일까. 설마 일부러 떨어뜨려놓고 간 건 아닌지 이도저도 아니라면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애타게 찾아 헤매는 중인지.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차들이 스치듯 지날 때마다 중앙선을 넘나들며 뒤척이는 신발 한 짝에 맘이 아려온다.
홍윤숙 시인의 '쓸쓸함을 위하여'란 시가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어떤 시인은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 하고/ 어떤 화가는 평면을 보면 모두 일으켜 세워/ 그 속을 걸어 다니고 싶다고 한다/(...)/ 다만 이 세상이 온통 비어서 너무 쓸쓸하여/ 어느 한구석에라도 집 한 채 지어놓고/ 외로운 사람들 마음 텅 빈 사람들/ 그 집에 와서 다리 펴고 쉬어가면 좋겠다/ (...)// 짝을 잃고 헤매는 것들이 어디 그들뿐이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이 있지만 이맘때쯤이면 '빈자리'가 더욱 더 자주 말을 걸어온다.
그들은 어째서 꼭 한 쪽 씩만 잊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전화를 걸거나 받을 때, 지갑이나 자동차열쇠를 가방에 넣거나 꺼내려고 할 때 한쪽만 벗어 입에 물거나 옆구리에 끼워 넣곤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럼없이. 옆구리에 끼워 두었다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스르르 빠져나가고 없다. 그럴 때마다 같이 있을 땐 가치를 잘 모르다가 잃어버린 뒤에야 깨닫게 되듯 짝을 이루고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곤 한다.
고장 난 자동차야 고쳐 쓰면 되지만 신발이나 장갑처럼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서랍이나 신발장 한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버려져 결국 잊고 잊힌다. 한쪽을 잃어버렸다는 것만으로 다른 한쪽도 쓸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언제부턴가 불 꺼진 집으로 나 홀로 들어서는 일이 두렵다.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오싹 한기가 돈다. 인기척이라곤 없다. 시루떡 사이사이 켜켜이 들앉은 팥고물처럼 방방마다 어둠이 진을 치고 있다. 왠지 모를 불안이 엄습해 온다. '돌아 나올까?' 망설이던 마음을 체념하듯 돌려세워 불이란 불을 있는 데로 죄다 켰다. 어둠을 밀어내는 불빛 사이로 드러난 걱정이 불기둥이 되어 솟아오른다.
환하게 불을 밝힌 그가 집에 있어야 하는데 없다. 늦으면 늦는다고 밥은 먹었으니, 밥상은 차리지 않아도 된다며 상 차리는 수고조차 덜어주던 세심한 사람이었는데…. 문득, 며칠 전 사소한 말다툼으로 인해서 돌아 누운 그 저녁 그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집안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으면 좋겠어. 불 꺼진 집에 홀로 들어서기가 쓸쓸해. 혼자 밥을 먹을 바엔 차라리 굶는 편이 오히려 더 낫겠어. 나도 늙나 봐."라며 으름장을 놓았었다.
막다른 골목 안 맨 끝, 잎과 감들을 털어낸 감나무 한 그루 반쯤 열린 창문 앞을 기웃댄다. 서슬 퍼런 한겨울 칼바람이 가지를 흔들며 스쳐 지나간다. 까치 두 마리 가지 끝에 앉아 정답게 만찬을 즐기고 있다. 그 곁,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선 목련이 뾰족이 꽃불을 켠다. 직박구리 한 마리 목련나무 가지 끝에 앉아 두 마리의 까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법정의 애송 선시'를 채우고 있던 고려시대의 문인이던 이규보의 '우물 속의 달을 보고'를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읊조려본다.
"산속의 스님 달빛이 탐이 나서// 물병 속에 함께 길어 담았네// 절에 돌아와 뒤미처 생각하고// 병을 기울이니// 달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네"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안 일이지만 그는 나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와 불 켜는 것도 잊은 채 작업복을 입은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한해의 끝과 또 다른 새해의 시작 사이 가는 겨울과 오는 봄 사이 끝과 동시에 시작이며 희망인 십이월이 지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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