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한차례 지나가고
강물이 결 따라 산허리를 베는 오후입니다
광원암 수돗가에 섬처럼 엎드린 숫돌에
조계산이 들어와 앉습니다
숲을 향해 있던 우묵한 섬에서
아버지 저벅저벅 걸어 나옵니다
뜻밖이네요, 이 먼 곳까지 오시다니요
수학공식 어려운 법조항 하나 몰라도
가난에도 결이 있단 걸 어찌 알았을까요
여윈 등 웅크리고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당겼다가 밀었다가 밀었다가 당겼다 할 동안
당신 무릎에 떨어진 눈물은 색깔이 없고
서럽고 무딘 날들이
어떻게 둥글어지는지 지켜보았지요
어젯밤에는 달빛이 한참 놀다 갔는지
벼린 낫처럼 달의 볼이 홀쭉해졌네요
◇서하=경북 영천 출생. 1999년 계간 ‘시안’ 신인상 수상. 2015년 제33회 ‘대구문학상’ 수상. 2016년 문학나눔 우수도서선정. 2020년 제1회 이윤수 문학상 수상. 2022년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문학작품집 발간지원사업 수혜. 시집: 근작 ‘외등은 외로워서 환할까’ 외 다수.
<해설> 광원암은 어느 사찰의 암자인 듯도 한데 그 수돗가에 섬처럼 엎드린 숫돌을 보게 된 것은 일상의 사건이나 풍경을 예사로 넘기지 않는 시인의 탁월한 관찰력의 성과물이다. 또한 거기에 “조계산이 들어와 앉습니다”라고 한술 더 뜨는 것은, 시인의 시적 언술의 능숙함이다. 섬을 불룩한 섬이 아니라 낫이나 칼을 갈아서 우묵해진 숫돌이니 우묵하다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인의 섬은 아버지를 불러낸다. 아버지는 학식이 깊지 않고 가난하고 여윈 등 아버지이다. 그런 아버지가 밀었다 당겼다 낫을 가는 동작을 고스란히 떠올리면서 “당신 무릎에 떨어진 눈물은 색깔이 없고/ 서럽고 무딘 날들이/ 어떻게 둥글어지는지 지켜보았지요”라고 시인은 심정의 바닥을 옮겨적고 있다.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