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 고수
[좋은 시를 찾아서] 고수
  • 승인 2023.12.12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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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진 시인

입에서 칼 한 자루 스윽 뽑혀 나왔다

날 끝을 허공에 빙빙 돌리다 나를 겨누더니

희번득한 빛이 우리의 간격을 두 동강 내며

순식간에 목을 향해 들어온다

방금 누군가를 해결하고 온 사람처럼

거친 숨소리가 삐딱한 자세로 칼등에 걸터앉는다

보기 드문 고수였다

입 안에 숫돌을 물고

날마다 자음과 모음을 갈고 있는지

일합만에 토막 나버린 내 말은 바닥에 나뒹군다

끝내 등을 주지 않는 내게

칼은, 일방적이었지만

전의를 잃은 상대의 숨은 남겨두는 자비를 지녔다

당신의 칼이 스르륵 칼집에 꽂히는 동안

나는 부러진 칼의 조각들을 줍는다

당신에게 닿지 못한 토막난 마디들을 이어 붙여

문장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나는 조목조목 아프다

◇권상진= 1972년 경북 경주 출생. 201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눈물 이후’, ‘노을 쪽에서 온 사람’. 합동시집 ‘시골시인-K’이 있음.

<해설> 아마도 권상진 시인이 시단에서 절대고수를 만난 모양이다. 그것이 시를 쓰는 일이든 어떤 직업군에서 오랜 숙련을 거친 그리고 최정상의 기술을 터득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을 일러 절대고수라고 한다면 그를 상대하는 일은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니다. 허를 내어주는 것 같지만, 그 허는 허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검술로 이 시를 끌고 가고 있는 시인 또한 그리 호락호락한 검술의 소유자는 아니다. 시말=검법을 동일선상에 놓고 볼 때 말을 휘두르는 것, 칼을 휘두르는 것의 화려한 기교 너머에는 항시 묵직한 정신이 있다. 또한 상대의 다음 동작을 다 읽는 안목이 있다. 오늘은 부러진 칼을 주워, 이어 붙이지만 그러한 노력 뒤에는 분명 상대의 숨은 남겨두는 그런 고수의 길에 들 수 있을 것이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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