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철 작가 개인전…갤러리 토마 20일까지
이영철 작가 개인전…갤러리 토마 20일까지
  • 황인옥
  • 승인 2023.12.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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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풀기 작업 ‘드로잉’, 이젠 그 자체로 ‘작품’
80년대 후반부터 매일 ‘그림일기’
한 때 추상 원해 관념의 탑 쌓아
상도 많이 받았지만 즐거움 없어
40대 중반부터 ‘순수의 세계’로
초상화에도 감수성 더해 재해석
수정 못할 볼펜 사용해 ‘그림의 맛’
30여년 작업 작품 6천여점 달해
기술이 자유로워야 창작 단계로
다시-팝페라가수배은희2023
이영철 작가가 팝페라가수 배은희를 드로잉한 초상화.
교사-이진경2023
이영철이 교사 이진경씨를 드로잉한 초상화.
동네술꾼1997
이영철 작 ‘동네술꾼’(1997).

운동선수는 경기 직전 몸 풀기가 필수고, 기계는 사용 전 예열 단계를 거친다. 준비 과정이 핵심 행위의 성과를 최대화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 하대하지만,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의식이다. 준비과정을 소홀히 하면 자칫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이영철 작가에게 그림 그리기 전 몸 풀기는 필수다. 예술이 내면의 표출임을 상기하면 그림 그리기 전, 마음부터 다스리는 것은 사전 의식으로 선결과제다. 그것이 그에게는 드로잉이다. 가수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목을 푼다면, 그는 드로잉으로 그림 그리기 전 몸 풀기를 한다. 드로잉의 소재는 일상이다. 일상에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단상들을 드로잉으로 표현한다. “생활인에서 화가로의 태세 전환을 이끄는 매개로 드로잉을 바라봅니다.”

몸 풀기의 도구 정도로 치부했던 드로잉의 반란이 시작됐다. 이영철의 드로잉 작품들이 갤러리 토마 전시장 벽면을 빼곡하게 채웠다. 갤러리 토마에서의 그의 개인전인 ‘나를 만나다 : 토마동네 사람들’전에 어림잡아 200여점이 족히 넘는 드로잉 작품을 걸었다. 갤러리 2층은 신작 드로잉 100여점, 3층에는 1990년대 드로잉 100여점이 소개되고 있다. 신작은 올해 초부터 갤러리토마 대표가 선정해 준 인물들을 드로잉 기법의 초상화로 그린 작품이다.

흔히 드로잉하면 연필이나 펜으로 대상의 윤곽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형식을 말한다. 과거에는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 구상, 즉 에스키스 정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점점 드로잉을 그 자체로 작업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영철은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매일 드로잉 한 두 점을 그려왔다. 그에게 드로잉은 “그림일기”였다. “본격적으로 회화 작업을 하기 전에 일상에서 느낀 생각들을 정리하며 드로잉으로 표현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들떴던 마음을 드로잉을 통해 차분하게 가라앉히죠.”

그림일기는 IMF 구제금융의 영향으로 시작했다. IMF 시기에 너나 할 것 없이 경제적인 나락을 경험했고,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재료비 부담이 커 유화 작업하기가 어려워졌다. 마침 작업실이 위치한 인쇄골목의 인쇄소들이 버리는 파지를 발견하곤 얻어와 드로잉의 재료로 활용했다. 규격에 맞게 잘라내고 남은 파지여서 크기가 제각각이었고, 그 마저 손바닥만한 것이 큰 규격이었다. 파지에 드로잉한 후 선묘가 자리를 잡으면 먹이나 오일파스텔, 유성펜, 콘테 등으로 채색해갔다.

몸 풀기의 수단으로 활용됐던 드로잉이지만 3층 전시장에 걸린 드로잉은 그 자체로 작품이다. 손바닥만 하거나 얼굴만 한 작은 규모에 최소한의 선과 색으로 표현했지만, 화면 속 서사는 현실을 통찰하고, 동양철학을 아우른다. 남자의 머리 위에 부처를 그린 작품에선 종교의 본질보다 상(像)에 집착하는 인간의 세태를 꼬집고, 다정한 연인의 뒷모습에 돈을 그린 드로잉 작품에선 사랑의 감정까지 물질에 좌우되는 현실을 통탄한다. 검은 땅 위에 오뚝 솟은 검은 무늬의 굴뚝을 그린 화면에선 환경문제가 불거진다.

이영철 하면 동화 같은 순수한 회화를 떠올린다. 사회적인 세태를 비판하는 날선 서사조차 동화같은 천진난만함으로 표현한다. 이는 그의 화풍이 가지는 특징이다. 그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그림을 추구한다. 드넓은 벌판에 만개한 매화나무나 야생화 가득한 들판을 동화처럼 순수하게 그렸고, 꽃으로 가득차거나 혹은 탁 트인 초록 풍경이 화면 가득 장악하지만 익살스러운 호랑이나 손가락만한 크기의 연인들을 던져놓으며 동화 속 이야기로 감상자를 끌어들인다.

동화를 빼닮아서 누구라도 편안하고 친근하게 그의 그림 세계로 빠져들게 하지만 편안함의 배경에는 “삶”을 다뤘다는 이유가 작용한다. 그는 거창한 구호나 이념보다 삶의 이야기를 화면에 구현한다. “일상에서 만나는 인물이나 현상들을 동화처럼 그립니다.”

그림 속 구호는 진지하지만 표현법은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춘다. 일상의 번뇌와 망상들이 순수로 평정된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더 진중하고, 더 무거운 예술적 표현을 갈망하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맞지 않은 옷일 뿐이다. “나의 체질은 무거운 것과 맞지 않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학창 시절 미술을 배울 때 예술은 가볍고 밝으면 안 되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모든 화가들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도 한때 무거운 추상을 원했고, 그런 화풍을 쫓았다.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관념의 탑을 캔버스에 쌓아 올렸고, 크고 작은 상도 받았다. 하지만 당시 그는 그림 그리는 것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성향은 무시하고 세상의 요구에 부응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내면 깊숙이에 자리를 잡아갔다.

“저의 본성 속에는 호기심이 많고, 누가 하지 말라면 더 하는 성향이었어요. 그런 본성을 꾹꾹 눌렀으니 그림 그리는 것이 즐거웠을 리가 없죠.”

40대 중반이 되면서 구상의 형식을 빌려 순수의 세계로 돌아섰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그런 세상을 화폭에 옮기면서부터 그에게 그림은 즐거움의 원천이 됐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나도 즐거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마음의 중심을 다잡았어요.”

따지고 보면 순수는 불순 위에 피는 꽃이다. 흙탕물 위에서 찬란한 꽃송이를 피워내는 연꽃처럼, 그의 인식 속의 순수 역시 마찬가지다. 활짝 핀 들판의 꽃 아래 동물의 사체와 낙엽들이 뒤엉켜 있다는 개연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결국 “불순과 순수는 본질에 있어 둘이 아닌 하나”라고 했다. “불순이라는 밑거름이 없으면 결코 순수의 꽃은 피지 않습니다.”

2층에 걸린 초상화 드로잉은 3층의 드로잉과 결을 달리한다. 선의 터치들이 보다 섬세해 일반적인 초상화에 가깝다. 실존하는 인물을 그린 만큼 작가가 그리고 싶은 방향과 화면 속 대상이 이해할 수 있는 상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은 결과다. 사실 그는 인물을 그릴 때 사진을 앞에 두고 그리지는 않는다. 사진으로 충분히 인물을 탐구하지만 막상 그릴 때는 뇌리에 남아있는 잔상을 그린다. “초상화를 그리지만 저만의 감수성으로 재해석을 합니다.”

화면이 순수하다고 마냥 예쁘고 밝은 것만은 아니다. 검정색이나 대상과 대상의 관계맺음 등의 다양한 방식을 통해 어두운 현실을 풍자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희망의 씨앗 하나는 남겨둔다. 어두운 색채 사이에 분홍빛 길을 형상화하거나 작은 꽃송이 하나를 슬쩍 던져 놓는 식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은 있어야 합니다. 고통을 견디려면 희망이 필요하죠.”

회화가 건물이라면 드로잉은 회화를 위한 토대인 것. 드로잉 속 형상들은 회화의 소재로 확장돼왔다. “드로잉은 회화를 위한 보물창고에요.”

흔히 드로잉의 재료로 목탄이나 연필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볼펜을 고집한다. 목탄이나 연필의 경우 수정이 용이하지만 볼펜은 한 번의 선긋기로 결판이 난다. 볼펜을 선택한 이유는 “스스로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기 위해서”였다. 선을 긋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필의 경우 수정을 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그림의 맛을 잃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아예 수정이 불가능한 볼펜으로 재료를 바꾸게 됐다.

“볼펜으로 할 경우 수정할 수 있는 상태를 애초에 차단하게 되고 그래서 그림의 맛을 살릴 수 있죠. 대신 집중해서 그리야죠.“

구상하는 시간은 길지만 막상 드로잉 하는 시간은 짧다. 하루에 초상화 2~3개는 거뜬히 드로잉 한다. 그림일기를 30여년간 진행한 결과다. 그의 작업실에 쌓여있는 드로잉은 어림잡아 6천여점이 넘는다. 오래 지속한 만큼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 같은데, 그가 ”드로잉을 할수록 계속해서 묘사력은 좋아진다“고 했다. 기능적인 발전은 끝이 없고, 숙달은 계속 성장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회화 작업에서 밑그림 없이 거침없이 화면을 구성하는 배경에 ‘드로잉’의 역사가 자리한다.

”진정한 창작의 고통은 기술적인 문제 너머에 있습니다. 표현력이 원활하지 않은 것은 창작의 영역이 아니라 기술의 영역인 것이죠. 창작의 단계까지 나아가기 위해 기술의 영역에서 자유로워야 하죠. 그것이 숙달이죠.“ 전시는 20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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