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독립투사 양성하던 구천서당, 택지개발에 ‘철거 위기’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독립투사 양성하던 구천서당, 택지개발에 ‘철거 위기’
  • 김종현
  • 승인 2023.12.13 21:3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8) 교학상장의 배움터
독립운동가 활동하던 최해운
1899년 ‘도남정사’ 세워
전주 최씨 진사 최치상 향배
현재 관리하는 이 없어 훼손
그의 4남 가운데 2남인 최고
항일학생비밀결사단 활동도
환성정
1582(선조15)년 금호강변 서변동 인천이씨의 태암(苔巖) 이주 선생이 ‘공경함은 항상 깨어있는 법이라’라는 의미에서 ‘환성정’을 세웠다. 그림 이대영

◇훼손되는 도남정사(道南精舍)

우국지사가 아니더라도 운양호사건(1875), 제물포조약(1880), 을미사건(1895) 등 연이어 떨어지는 걸 보고, 일제가 강제점령을 위해 전초작업을 하고 있음을 눈여겨봤던 영남선비들은 자주자강 혹은 각자도생 차원에서 교학상장을 위한 배움터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도덕산 아래(國憂洞) 솥골(鼎谷)마을에 전주최씨의 진사 최치상(崔致翔, 1831~1886)을 향배하는 재실로 1899년 손자 최해운이 도남정사를 세웠다. 최해운은 1924년 5월 김창숙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돕고 있던 손후익(孫厚翼)을 만나 임시 정부의 활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1926년 1월에는 경상북도 유림단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던 이동흠에게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김창숙과 곽종석이 추진한 유림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의 4남 가운데 2남 최고는 시인이었다. 최고 시인은 1941년에 보성전문에 진학했으나 항일학생비밀결사 흑백당 결성으로 추적당하다가 만주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국내송치, 대전교도소에 수감하다가 해방을 받아 출옥했다. 그러나 현재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도남정사로 남아있어 날로 훼손되고 있다.

태전동(566번지) 달성서씨 감찰공파로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서진손(徐震孫, 1426~ 1493)과 아들 서미수(徐眉壽, 1453~ 1516)를 추모하는 재사로 매강정사(梅岡精舍)가 있었다. 이매동 뒷산에서 1982년 이곳에 이설 중창하였으며, 서미수의 손자 죽계(竹溪) 서재겸(徐再謙, 1557~ 1617)은 형 서득겸(徐得謙)과 임진왜란 때 의병창의와 아금암(牙禁巖) 접전참패와 화왕산 곽재우 휘하참전으로 선비의 견위수명(見危授命)의 모델을 만들었다. 함지산(혹은 觀仁山) 기슭 운암지에서 옻골로 가는 오솔길목(鳩巖洞)에 1919년 안동에서 삼일독립운동 전개와 일제기관 파괴로 독립운동을 했던 지강(芝剛) 이승연(李承淵, 1889~ 1956) 선생은 1932년에 ‘운곡서당’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했으며 현재는 건물만 남아있고,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수산 기슭 팔거천 물섶(邑內洞)에 달성배씨 재실 원모재(遠慕齋)에다가 1936년 구천서당이란 이름으로 문중강학당을 개관하였다. 순자의 권학편의 “삼밭에 다북쑥은 곧게 자란다(麻田蓬生不扶直).”라는 교육환경 효과가있어 독립투사를 양성했다. 사례로는 배상갑(裵相甲, 1924~1979)은 일제의 강제징병으로 중국 전선에 참전해 다수의 학도병들과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 수차례 항일전투에 참전했다. 구천서당에 대해 ‘문중고시촌’역할만 했다는 평가가 있었으나, 2022년 말경에 구수산 택지개발로 인해 철거될 운명에 놓였다.

◇금호, 성씨의 고향(Home of Surname)의 재실(齋室)은?

팔공산 기슭 아래 금호강 물 섶에 자리잡고 있는 대부분의 집성촌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란을 계기로,‘조망피신(眺望避身, Prospect and Refuge)’이 확실한 은둔지를 찾아서 택리를 했다. 전쟁이란 인위적 재앙뿐만 아니라, 가뭄과 수해 등의 천재지변에서도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자는 정감록의 십승길지(鄭鑑錄之十勝吉地)사상이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함지산 기슭 동네만 예시를 들어도 논어실(論語室, 魯谷洞), 장태실(藏胎室, 梅川洞), 그리고 비로실(飛鷺室, 鳩巖洞) 등. 동네이름을 안방처럼 포근한 보금자리 명칭으로 다듬었다.

대구에 대표적인 비보풍수설(裨補風水說)에 입각해 택리하고 설계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은 임진왜란 이후에 입향조 대암(臺巖) 최동집 경주최씨 세거지로 형성되었다. 집성촌에서는 문중서원 혹은 서당을 열 수 없다면, 조상의 은공을 생각하는 원모재, 추모재 혹은 영사재 등의 이름으로 모임터 혹은 배움터를 세웠다. 매년 배향하면서 뿌리와 혈통을 서로 확인하고 혈족간 회맹을 하는 셈이었다.

오늘날 북구에 해당하는 지역의 재실을 살펴보면, 산격동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재(擡齋) 서사진은 대구도호부 읍내와 3개 속현에서 의병조직을 결성하고, 대구도호부 읍내6리 가운데 북산리 유사(有司)를 맡았던 의병장으로 전투와 활동을 했다. 그를 추모하고자 1650(효종1)년 용담재(龍潭齋)가 설립되었고, 1888(고종25)년에 중수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3형제의 재실(사랑채)로는 나중에는 체화당(逮華堂)으로 개명되어 문중의 강학소 혹은 향소로도 모임과 배움의 터전이 되었다.

1582(선조15)년 금호강변 서변동 인천이씨의 태암(苔巖) 이주 선생은 ‘공경함은 항상 깨어있는 법이라’라는 의미에서 ‘환성정(喚惺亭)’이라는 이름의 정자를 세웠다. 여말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분인 능성구씨 시문정공 송은(松隱) 구홍(具鴻)과 임진왜란 때 의병창의와 선조31년 1월4일 울산전투상황 보고를 체찰사 류성룡에게 장계로 상신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되어 있었다. 그의 8세손 첨정공 계암(溪巖) 구회신(具懷愼, 1564~ 1634)을 향배하고자 1659(효종10)년에 추모당 송은(松隱)과 계암(溪巖)을 합쳐 ‘송계당(松溪堂)’을 세웠고, 1960년에 중건했다. 동변동 산37번지 경주이씨 금남공을 추모하기 위한 영사재엔 ‘경주이장(慶州李庄)’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1600(선조33)년 능성구씨의 구홍과 구회신을 추모하고자 1600(선조33)년에 화수정(花樹亭)을 세웠다.

이어 조야동 샘골에 영동박씨 재실인 원사재 및 함지산 기슭에 달성서씨 추모재가 있다. 대구의 추로지향을 대표하는 동명 논어실과 배산을 공자숭상의 의미를 담아 관니산(冠尼山, 오늘날 함지산)이라고 했던 노곡동에서는 안골 태충각 내 왼쪽엔 계유정란에 사육신의 한분이었던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1399~ 1456) 선생이 있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117회이나 나오며 태종실록 36권 춘추관의 편수관명단(記事官)을 시작하여 정조15년 2월21일자로 장릉 배식단의 배향자 명단기록(正壇配食三十二人)까지 나오고 있는 현관(賢官)이었다. 그를 추모하는 재실 경의재(景毅齋)와 오른쪽에는 노곡동 입항조 김귀송의 재실인 사성재(思誠齋)가 자리잡고 있다.

도덕산 아래 도남동에선 임진왜란 전에 입향했던 정선전씨(旌善全氏)의 1917년에 중수했으나 20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도남재(道南齋)와 고려 927년 동수대전(桐藪大戰)에서 전사했던 전이갑(全以甲)과 전의갑(全義甲) 형제를 숭상하는 이충사(二忠祠)가 있다. 또한 덕산이씨의 백암재실이 있었다. 도남지 아래 동네(국화마을, 菊洞)는 임진왜란 뒤에 입향한 인천이씨 쌍명재공파의 세거지로 1774(영조20) 남호정사(南湖精舍)를 건립했고, 국동문중(菊洞門中)의 7대손 이해준(李海俊)은 범국회(泛菊會)를 개최하고 1864(고종1)년에 유화당(有華堂)을 건립했다. 유화당기(有華堂記)엔 “국화꽃이 있어 집이 빛나니 국화 꽃집이로다. 국화와 더불어 무궁하리라. 국화 있음을 집이름으로 삼겠노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국우동의 원모재(遠慕齋), 동호동 도산재(道山齋), 산격1동 용담재(龍潭齋), 읍내동(1090번지) 구수산 아래 달성배씨의 원모재(遠慕齋), 관음동 양지마을에 달성배씨 죽와(竹窩) 배경국(裵經國, 1746~ 1812)의 재사(齋舍)로 1830년 건립된 봉서재(鳳棲齋)가 1869년 훼손되어 중수기문은 관천(觀川) 배석하(裵錫夏)의 글이었으며, 1926년 관천 배석하(裵錫夏, 1857~ 1936)는 칠곡향교의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서 후생가외(後生可畏)의 강학당으로 관천재(觀川齋)를 건립했다.
 

 

권택성<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