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 구덩이 내가 판다
배꼽 안쪽
꽃 떨어진 자리는 이윽고 저승
칼날을 대고 보니
갈라진 호박 속의 씨앗들
오래 쌓아둔 씨앗의 書架가 있다
이제 몸통을 발라낼 차례
육질은 한소끔 끓여내고
아랫목 장판지 위에 늘어놓은
씨앗의 행간을 읽는다
한 줌 호박씨 입안에 털어 넣고
미리 맛보는 후생의 맛이 슴슴하다
썩은 몸에서
몇 알의 씨를 발겨
땅속에 다시 돌려보내는
내가 판 구덩이 속
내가 가만히 들어앉는 일
◇이복희=2010년 문학시대 수필 신인상, 2022년 계간 ‘시에’ 시 시인상. 시집 ‘오래된 거미집’ 이 있음.
<해설> 단순한 호박을 단순하지 않게, 생과 소멸의 현장으로 시인은 데려다 놓는다. 그러고는 대상과의 치밀한 말 걸기를 통해서 존재를 향한 물음과 답을 동시에 구하는 등 사유의 깊이로 보아 시 쓰기의 내공이 만만치 않은 게 단번에 느껴진다. 내가 들 구덩이를 내가 판다는 것도, 그러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배꼽 안쪽 / 꽃 떨어진 자리는 이윽고 저승’이라는 직관 만으로도 이 시는 이미 성공을 거둔 시이다. 그런 다음 관찰된 호박을 통한 다양한 묘사는 촘촘히 책이 꽂힌 書架였다가 육질을 내어주는 보시의 행위였다가 결국 씨로 다음 생을 이어가는 호박의 생과 인간의 생을 대비의 미학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