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비움에 대하여
[달구벌아침] 비움에 대하여
  • 승인 2023.12.17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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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청소의 묘미는 치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한해가 끝을 향해 비어간다. 수식 없는 바람이 수직으로 불어온다. 끝 간 데 없이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체로금풍만월추’ 란 메시지가 뇌관을 타고 스며든다.

어느 날 제자가 스승인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질 때는 어떠합니까?” 선사께서 답하셨다. “체로금풍(體露金風)!”(벽암록 제27칙)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민낯의 모습처럼 체로는 본체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바람에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결국 나무 본연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단풍만 보고 단풍이 져 드러난 나뭇가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일러 비유한 말이란 걸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다.

풍성하고 화려한 무늬와 색으로 한 시절을 수놓았던 꽃과 나무들이 그 이파리들을 모두 내려놓고 체로금풍으로 그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나뭇잎이 시들어 만장처럼 흩어져 나부끼는 때, 자극적 프레임 뒤에 가려진 선생님의 숨은 진실은 뭘까? 생각하며 한티재를 오른다. 길가에 줄지어 선 나무들의 당당한 자태를 본다. 바람의 지휘봉을 따라 각양각색의 나뭇잎 새 떼가 하늘의 기별인 듯 춤을 춘다. 한차례 악장을 넘길 때마다 본체를 드러내는 저 나무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초등학교 시절, 삶의 위기를 맞을 적마다 사람의 귀하고 천함은 항상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언행일치’에 달려있음을 강조하며 어깨를 다독여 주시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서른 해 만의 일이었다. 통지표의 뒷면 행동발달란에 ‘나이에 비해 너무 어른스럽다’며 애처로운 속내를 슬그머니 보이시고, 어린 내 어깨 위에 짐 지워진 삶의 무게를 어른들의 잘못 인양 미안해하시고, 바닥을 치면 그 바닥을 짚고 일어서야만 바로 설 수 있다고도 가르쳐 주시던 분이었다.

생의 사거리, 비보호구역에서 지도를 펼칠 때마다 선생님이라는 군림을 멈추고 기꺼이 바닥으로 내려와 학생들과 나란히 어깨를 맞댐으로써 우리들, 삶의 지표가 돼 줬다. 그 덕에 학교를 다니는 내내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내 꿈을 단 한 번도 접은 적이 없었음을 기억해 낸다.

산을 오르며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자 이 길을 나섰던 것일까, 생각해 본다. 비상깜빡이를 켠 채 차를 갓길에 세운 후, 내려 맨땅을 디뎌본다. 반갑다는 듯 나뭇잎이 떨어져 발등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길을 잃으면 지도를 펼쳐야 하듯 내가 쓴 글을 선생님께 보이며 가야 할 방향을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내 이름을 불러주며 ‘네가 제자라는 게 참 자랑스럽구나!’ 흡족해하셨다. ‘잡다한 생각의 흙탕물이 일면 그대로 가만히 놓아둠으로써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게 ‘가라앉힌 후 떠오른 정제된 생각으로 글을 써야 한다.’며 호된 꾸지람도 서슴지 않았다. 내가 쓴 글이 지치고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얹어줬다.

“꼭! 끝까지 읽어 봐야 한다.”며 또다시 문자가 날아든다. 선생님이 보낸 가짜 뉴스다. 백순 까지는 아니라 쳐도 육십 년만 헤아려 십분의 일밖에 안 되는 초등학교 육년, 그 중 일 년이 선생님과 인연의 전부다. 그 일 년의 인연으로 그분이 내게 해 줬던 채찍과 당근의 말은 삶의 지표가 됐다. 팔순을 넘어선 선생님을 다시 만나면서부터 시든 낙엽처럼 시시때때로 날아드는 문자로 인해 또다시 난 비보호구역에 선다. 거짓이 사실을 압도하는 세상인 듯 사실에 사회적 맥락이 더해진 진실이 자연스럽게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어둑해진다.

인생은 그림 같은 것이라 하듯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것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숲이 보이고, 희미하던 윤곽들이 선명하게 보이고, 그 속에서 새삼스레 아름다움과 맞닥뜨리게 되기도 한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남은 12월, 새 다이어리의 첫 장에 옮겨 적으며 마음에 담아본다.

깊이 파고들어 내 안을 바라보기에 좋은 저녁, 채웠던 단추를 풀고 잠옷으로 갈아입으며 길에서 주워 온 붉은 단풍잎을 책갈피 사이사이 끼워 넣는다. 금풍에 제 몸과 마음을 드러내는 일처럼 어쩌면 체로금풍은 내가 지금껏 본 나무 중에서 가장 진실한 나무일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고 언젠가는 그 형체가 드러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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