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궁지에서 분분히 하강하는 피난,
눈이 내린다
오랜 나날 그 앞을 지나다녔으나한 번도 본 적 없는 골목의 입구
시든 꽃나무 흙덩이를 안은 채 깨어진 화분들과
창백하게 뒹구는 연탄재 위에도 눈이 쌓인다
여기는 어디선가 본 멸망의 나라
사람들 모두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가고
건너편 횟집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만
화석처럼 뻐끔뻐끔 이곳을 바라본다
두껍게 얼어붙는 시간의 계곡이
전 생애의 날개를 저어 떠나버린 것들의 뒷모습을 닮았다
하얀 침묵이 소리 없이
지상의 발목까지 내려 쌓이는 동안
그 골목으로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다
폭설이 서서히 골목의 입구를 닫고 있었다
◇사윤수=1964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남. 2009년 아르코 창작지원금 선정으로 작품 활동함. 2011년 ‘현대시학’ 신인상 수상. 시집 ‘파온’, ‘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 출간. 2018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받음.
<해설> 내리는 눈을 두고 궁지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본다는…,엉뚱하고도 어쩌면 내면 심리가 반영된 눈은, 그냥 단순한 눈이 아닌, 그 무엇도 될 수 있다는 암시다. 자유다. 눈이 시 안에 있고 그 눈의 배경에는 실재하는 골목이든, 시인의 상상 공간으로서의 골목이든 하여튼 이 시의 중심 배경에는 상징으로서의 골목이 등장하고 있다. 골목이라고는 말하지만 그건 골목이 아닐 수도, 비애일 수도, 가난일 수도, 아무튼 풍족함 쪽이 아닌 결핍의 골목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이 시는 일기를 다룬 시가 아닌 재개발을 핑계로 폐허가 되어가는 민초들 주거지 풍경이거나 사람들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 어디선가 본 듯한 멸망하는 나라의 장면이 하얀 침묵을 받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