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송년인사: 더 쉽고 더 친절하게
[백정우의 줌인아웃] 송년인사: 더 쉽고 더 친절하게
  • 백정우
  • 승인 2023.12.2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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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화려하고 맛있고 대단한 음식들이 넘치고, 영화에도 그런 음식들이 나올 텐데 굳이 평범하고 흔하고 싼 음식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모 대학교에서 열린 ‘취향과 문화자본’ 강연장에서 어느 학생이 던진 질문이다. 맞다. 내 책 『맛있는 영화관』에 나오는 음식은 잔치국수, 국밥, 김밥, 짜장면, 삼겹살, 곱창전골, 육개장 같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서민음식이고 속칭 식사용 라인업이다. 미슐랭 별이 자랑스레 달린 파인 다이닝의 휘황찬란한 코스요리나 값비싼 초밥 오마카세는 없다. 나의 대답은 간단했다. 책을 읽고 영화를 찾아보고, 마침내 영화에 나오는 음식까지 맛보고 싶어지면 제가 책을 잘 썼다는 증거일 텐데, 만약 먹기 힘든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냐고? 값이 비싸거나 쉽게 접하기 힘든 요리라거나, 특정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다면.

학창시절로 기억을 더듬으면 동네마다 음악다방이 있었고, 음악에 정통한 DJ가 뮤직박스를 지켰다. LP까지 사 모으던 자칭 팝송도사인 친구는 매번 듣도 보도 못한 곡을 적어 뮤직박스로 보냈다. 친구의 리퀘스트를 읽는 DJ마다 팝송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분 같다느니, 내 대신 진행해도 될 거 같다느니, 너스레를 떨었지만, 결국 신청곡은 틀어주지 않았다. 음반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쭐거리며 으스대던 친구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을 많이 아는 자신의 모습에 빠져있었다. 그가 좋다고, 죽인다며 침 튀겨가며 칭송하는 노래를 나는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하루는 내가 물었다. 음악다방에 없는 곡들만 골라서 신청하는 심보가 뭐냐고.

박찬욱 감독은 데뷔작과 두 번째 영화의 연이은 실패 이후, 생계를 위해 평론가 생활을 하면서 당시만 해도 대중에게 생소한 B급 영화들을 대거 소개했다. 이 시절 박찬욱이 영화를 선정하는 원칙은 단순했다. 첫째, 널리 알리고 싶은 좋은 영화를 쓴다. 둘째, 찾아볼 수 있는 영화 중에서 쓴다. 나쁜 영화를 비판하기 보다는 좋은 영화를 권하고, 아무리 좋아도 독자가 찾아보기 힘든 작품은 제외한다는 것이다. 박찬욱 영화가 미학적 성취 뿐 아니라 대중성까지 확보하게 된 바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리 예술의 가치가 희소성과 직결된다고 해도, 소비자가 없으면 희소성 자체가 무용지물이기 마련이다. 대중과 유리된 예술, 그런 작품에 열광하며 남다른 심미안을 가진 양 우쭐대는 이들을 본다. 남들은 모르는 걸 내가 안다는 식의 과시욕과 인정욕구에 목 맨 사람들. 관념에만 존재하는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 헤매는 탐험가의 형상이다. 들을 수가 없는 음악과 볼 수 없는 영화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같은 이유로 내 책을 읽은 평범한 독자가 맛볼 수 없다면, 나 지식을 과시하는데 급급한 지적허영에 찌든 인간에 불과할 터였다. 시장과 동네에서 학교 근처에서 누구나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식당들, 이를테면 힐링 푸드에 가까운 음식들이 선택된 까닭이다.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연초에는 좀 더 쉽고 좀 더 친절한 어조로 영화이야기를 전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맘때가 되면 역시 온갖 부족한 것투성이다. 그래도 새해엔 더 좋은 글로 만나고 싶다. 한 해 동안 ‘백정우의 줌 인 아웃’을 읽어준 독자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백정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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