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후 밥벌이로 이발 기술 배워
개업 초 교회 목사 요청으로 시작
매주 화요일 요양원서 이발 봉사
사회복지학과 대학원 진학도
봉사만 23년째인 그의 작은 이용소에는 수십 개의 표창장이 그간의 세월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최근 수상한 국토부장관상과 국무총리상을 전시하며 “가문의 영광”이라고 수줍게 웃어 보였다.
가운을 정갈하게 고쳐 입은 이 씨는 퇴직 후 소위 ‘밥벌이’를 위해 배운 이발 기술이 봉사의 시발점이었다고 회상했다. 군대를 마치고 경남 창원의 대기업 공장에서 22년간 근무한 이 씨는 IMF 금융위기가 오며 명예퇴직하게 됐다. 답답한 마음에 들른 이발소에서 “이발 기술 배워놓으면 밥은 안 굶는다”는 말에 혹해 기술을 배웠다.
때는 2000년도, 대구 칠곡이 한창 개발 중일 때 퇴직금을 쏟아 이용소를 개업했다. 개업 초기 한 교회의 목사가 “우리 집에 아이들이 많은데 머리 한번 잘라주실 수 있냐”는 요청에 흔쾌히 승낙한 그는 당일이 돼서야 ‘우리 집’이 ‘아동복지센터’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그의 봉사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가게가 쉬는 화요일이면 실버타운, 주간보호센터, 요양원 등 시설이 문을 여는 오전 9시부터 분주하다. 점심 식사 전까지 150여명의 어르신들의 머리를 잘라야 하기 때문.
본격적인 봉사를 위해 공부를 시작한 그는 영남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의 08학번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상담복지학과 2년, 평생교육학과 2년까지 총 8년 대학을 다니다 대구한의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까지 진학했다고.
봉사활동을 오래 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어느덧 어르신들이 ‘단골 손님’이 돼 있었다”며 “‘이발하러 왜 안오노. 머리 많이 길었다’, ‘우리 아들보다 더 낫다’라는 말을 들으니 차마 그만둘 수 없었다. 그 정겨움이 여기까지 왔다”고 전했다. 류예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