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던 자리가 제자리임을 알 때 망각은 잔인하지 않아요// 오만에 겨워 광채 나던 얼굴 한아름 보듬어 안았던 뽀얀 살결/ 꽃잎 떠나고 난 자리에 남아 마른 꽃대는 도란거리죠// 뜨거워진 심장이 토해내던 숨결도, 폭발하던 열매의 함성도/ 격정이 남긴 얼룩무늬도 결국에는 모두 사라진다는 거죠// 불길한 힘겨루기에도 급급하던 변명 상처 난 꿈일수록 소란했고/ 절정은 오래 머물 것처럼 버티다가 끝내 내린 꼬리로 도망쳐버려요//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고 누구도 바라보아주지 않는/ 그런 구석 자리 꽃이 조금 더 오래 피었죠// 뒤란에 쪼그리고 앉아 간신히 피워올린 꽃 한 송이 말라가도/ 추운 거미 한 마리 숨겨주는 내 꿈은 그런 둥근 화분
◇김정아= 경북 상주 출생. 계간 ‘문장’ 신인상 등단.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형상시학회, 대구시인협회, 문장작가회 회원. 시집 ‘채널의 입술’이 있음.
<해설> 역설적으로 말하면 머물던 자리가 제자리인 걸 모르면 망각은 잔인한 것이다. 꽃은 떠나고 꽃이 머물던 그 허공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애틋하면서도 예리하다. 꽃은 떠나고 없어도 꽃대가 한때 나도 잘나간 적 있다고 수런거리는 소리도 듣는다. 그러나 모두 사라진다는 것은 불변의 어떤 법칙이지만 시인에게는 비애로 다가오고 있음을 어쩌랴. 뜨거워진 심장이 토해내던 숨결도, 폭발하던 열매의 함성도, 격정적 사랑이 남긴 얼룩무늬도 결국엔 다 지워진다는 것, 그러나 망각을 두고 시인은 잔인해지지 않으려는 따듯한 다짐을 시안에 징검돌로 놓고 있다. 자신은 쓸모를 다하더라도,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좀 더 오래 잔잔히 피울 꽃을 궁리하는 시인은, 망각을 모르는 꽃을 꿈꾼다. 꽃이 다 마른 뒤에는 추운 거미 한 마리 숨겨주는 내 꿈은 그런 둥근 화분이라는 대목에서는 왠지 흔들리지 않는 잠꼬대가 당차게 느껴진다.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