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를 찾아서] 만년필
[좋은 시를 찾아서] 만년필
  • 승인 2024.02.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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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숲

어쩌다 선물 받은 당신에게도 다리가 있었구나
전장에서 돌아온 퇴역 군인 같은
외발

눈 쌓인 바닥을 발 도장을 찍으며 함께 걸을까

이토록 오래되어 쓰지 않는 이야기
열 맞춰 걸어가면
쏟아지는 네 진심

사실은 군대 가 본 적도 없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엿가락처럼 허벅지를 분질러 먹은
산재 처리된 젊음이
하얀 눈발에 절뚝이는 꽃으로 피어날지도 몰라

왕년에 힘깨나 썼다는 전설은
우리들의 USB에 잘 저장해 두었어

잊혀 가는 너의 뒷모습을 첫사랑이라고 불러도 되겠니?

그 후 너의 연애는 지나가고
나의 연애도 지나가고

피아노 건반을 연주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면
아스라이 비등점을 넘나드는 난타 소리를 들으며

불구의 너를 하룻밤 가지고 싶다

한쪽 발로 견디고 있는 당신의 추위를
따스한 손으로 꼬옥 안아 줄게

◇안이숲=경남 산청 출생. 2021 계간《시사사》 등단.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간지원금 수혜. 시집;요즘입술.

<해설> 시인이 넘나드는 상상의 경계는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만년필이 제목이라서 필기도구인 만년필을 이야기하는가 했는데, 어느새 다리를 잃고 돌아온 퇴역 군인으로 건너가는가 싶다가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엿가락처럼 허벅지를 분질러 먹고 산재 처리된 젊은 첫사랑을 들먹이고 있다. 현재 시인은 손에 쥐고 있는 만년필을 의인화하고 있다. 손가락이 안고 있는 만년필의 동작을 보여주면서 너는 외다리의 불구이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는 따듯한 시인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 사회의 소외되고 힘든 사람들을 향한 지극히 따듯한 사랑을 이 시는 에둘러 형상화하고 있어, 만년필이라는 본질 너머 경험의 세계로 데려가는데 나름 성공한 시로 읽힌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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