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재룡 지사, 조국 위해 탈영한 진위대 참교...대한광복회 재건 한평생 바쳐
우재룡 지사, 조국 위해 탈영한 진위대 참교...대한광복회 재건 한평생 바쳐
  • 박용규
  • 승인 2024.02.2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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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재조명해 본 대구경북 의열투쟁 선구자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반발
광복회 길림지부 책임자 역할
20여년간 일제치하 옥살이도
1955년 71세 일기로 눈 감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대한광복회
우재룡 지사는 1915년 박상진, 김좌진, 유창순, 채기중 등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사진은 현재 달성공원에 있는 관련 표식. 박용규기자
 
우재룡
 

“의병은 무슨 이유로 했는가? 나라를 찾고자 한 것이다”

구한말 의병 활동으로 일제에 맞서 싸운 우재룡(사진) 지사는 일제강점기 초 대구·경북지역 의열투쟁을 이끈 독립운동의 선구자다.

우재룡 지사는 1884년 1월 경남 창녕 출생으로 젊은 시절부터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 대구부 진위대 참교로 있던 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에 반발해 탈영하고 본격적인 항일 투쟁을 시작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된 후에는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의진에 합류해 경주, 영일, 영천, 청하 등지서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무기 구입을 위해 대구에 잠입했다가 1908년 일제 경찰에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특사로 석방됐다.

이후 물밑에서 활동하던 우 지사는 1915년 총사령 박상진과 부사령 김좌진, 유창순, 채기중 등과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전국 각지에 지부를 두고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해 만주지역 독립군 양성에 도움을 주거나 친일부호를 처단한 최대 항일 비밀결사였다.

우 지사는 대한광복회 조직 확대를 위해 만주로 파견돼 당시 부민단(扶民團), 신흥학교 등과 연계해 광복회 길림지부 총책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18년 비밀결사였던 대한광복회의 존재가 일제에 노출되면서 회원 다수가 붙잡혔다. 이때 총사령이던 박상진 의사도 붙잡혀 대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순국했다. 우 지사는 해외로 탈출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듬해인 1919년 3월 거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자 우 지사는 동지들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로 자금을 보내는 데 매진했다. 또 1920년 임시정부와 협력하는 단체로 주비단(籌備團)을 결성해 임시정부 발행 공채증서의 매각, 자금 수합 등을 지속했다.

그러나 국내 활동의 한계로 장기간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그는 일제에 또다시 붙잡혀 1922년 경성법원에서 두 번째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6년간 옥고를 치른 후 1937년 출옥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우재룡 지사는 대한광복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다가 1955년 3월 경북 달성군(현 대구 달성군)에서 71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됐다.

달서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는 애국지사 백산 우재룡 선생상과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박용규기자 pkdrgn@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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