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여 년 전부터 ‘덜 가르치고, 더 많이 배울 수 있도록(Teach Less, Learn More: TLLM)’ 정책을 운영하는 싱가포르의 경우 교육과 질적 성장을 위한 화이트 플레이스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전 교육과정 내용을 20까지 줄이게 되었으며, 특히 초등학교 1~2학년의 기간 동안 6개의 프로젝트 형식의 주제 탐구를 학교 자율로 수행하여야 하는 능동학습 프로그램의 경우 수업 설계의 재량권이 학교에 부여된다. 독일의 경우 1/3의 시간이 학교 자체의 교육과정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역량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정부의 요구 사항을 감소시키고 학교의 자율성을 증대하며, 내부 차별화를 통해 학교 자체의 질적 발전을 요청한다. 이러한 교육과정의 대강화는 위의 국가들 외에도 미국, 일본, 캐나다 등 다양한 국가의 교육과정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역시 ‘교육과정의 대강화’를 화이트 스페이스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교육과정 내에서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 등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는 거다. 포괄적으로 제시한 교육과정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면서 단위 학교는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획득한다. 현재 매시, 매분, 매초 폭발적으로 확대되는 지식에 대한 학습 전반을 이미 교육으로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학습 요소나 학습량을 하나하나 국가가 제시하는 교육과정은 시대 흐름에도 맞지 않는다. 학교는 차별되는 질 높은 교육을 위해서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류의 변화는 개정 교육과정에서 학교 자율 시수 도입, 선택 교육과정의 운영 등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교육되어야 할 지식을 국가가 정해주지 않아서 학교가, 교사가 교육의 질을 담보할 수 있느냐는 염려를 하는 것은 이미 고루한 생각이다. 이미 급변하는 사회는 일관된 하나의 교육과정으로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더불어 교사와 학교는 교육 전문가로서 발전을 거듭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국가가 제시하는 일관된 학습을 하향식으로 전달만 하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편, 화이트 스페이스는 업무 환경에 있어서 멈춤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공백’이라는 공학적 의미를 지닌 단어 뜻 그대로, 여기에서 화이트 스페이스는 문제 해결을 위한 전략적인 멈춤이며, 업무의 효율화를 위한 활동의 멈춤이다. 기업가이면서 기업 대상의 고문인 줄리엣 펀트 역시 업무를 돌아보고 생각할 1분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녀는 쉬는 시간에 쉬라는 것이 아니라 업무 시간 중에 멈춰서라고 조언한다. 나 역시 업무 시간 가운데 잉여의 시간이 주어졌던 기간에 더 나은 아이디어, 창의적인 생각을 해낼 수 있었던 경험이 분명하게 있다.
싱가포르의 경우 교사의 전문성 신장을 위해서 평균적으로 잉여의 시간 두 시간을 보장한다. 그 시간 동안은 다른 강사 등을 채용한다. 한 시간은 교사 각자의 여유를 확보하면서, 나머지 한 시간은 전문학습공동체를 위한 시간으로 교사의 스케쥴에 명시한다. 최근 더욱 확산되고 있는 IB 역시 공식 문서를 통하여 교사의 전문성 신장을 위한 워크숍을 여는 동안은 워크숍에 참여하는 교사들을 대신할 기간제 교사를 채용하는 등 교사의 시간을 마련하는 방법을 조언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전문성 신장에 대하여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반면, 기존의 업무나 티칭 시간을 줄여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하던 일은 하던 대로 다 하고, 별도의 시간을 추가로 내어서 전문성을 신장하도록 이야기한다. 한정적인 에너지를 활용하여 다른 중요한 일을 하기에 좋은 선택은 아니다. 다른 일을 줄여냈을 때 형식성을 넘어선 진정성 있는 연구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전문성 신장을 지원하는 화이트 스페이스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