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딸의 터널
[달구벌아침] 딸의 터널
  • 승인 2024.03.0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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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다. 화학 반응이 일어날 때 원자의 배열만 달라지고, 물질을 이루는 원자의 종류와 개수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삶에도 행복과 불행, 고통과 즐거움 등 상반되는 것들이 총량이 있고, 무엇이 먼저 나타나느냐의 순서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렇다면 홍희는 초년운보다는 말년복이 좋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 아무리 힘들어도 마지막에 웃는 것이 더 좋다. 그것이 지금 힘들어도 참고 견디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홍희는 이제 자신이 겪어야할 불운과 불행은 다 겪었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힘들었다. 이제 남은 생은 힘든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그렇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너무나 힘든 일들이 많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그래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걱정을 하자면 끝이 없다. 아직 직장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승진, 군 제대후 복학하지 않은 아들, 반수를 했으나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하고 복학하지 않은 채 공부하고 있는 딸, 얼마전 심혈관질환 시술을 한 남편. 이제는 자신이 생각한 의무는 다 했기에 그들이 스스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자신은 최선을 다 했고 나머지 일은 때가 되면 저절로 일어날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면 될 일이었다. 승진을 위해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자신이 알아서 할 나이가 되었다. 남편도 23년만의 두 번째 시술을 겪으며 스스로 건강을 더 잘 챙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신경쓰이는 일이 있다. 딸이 지금 터널 속에서 힘들어 하고 있다. 자신이 견뎌내고 이겨내야 할 터널이라서 빨리 나오기를 기다려주기로 했는데, 딸이 엄마인 홍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고 있다. 퉁퉁 부은 얼굴로, 새빨개진 눈으로 눈물을 주르륵주르륵 흘리며 참아왔던 감정을 쏟아냈다.

그건 니가 겪어내야할 일이야. 왜냐하면 인생에도 질량보존의 법칙이 있거든. 언젠가 한 번은 심하게 겪을 일을 지금 미리 겪고 있으니 힘내라고 늘 마음으로 응원하고, 도시락 반찬을 싸주었는데 그것만으로는 힘이 되지 않았나 보았다. 딸은 엄마에게 감정을 토로했다.

외면하고 싶었다. 방금 긴 터널에서 나와서 햇빛을 받으며 충전하고 있는 중이라서 딸이 긴 터널 속을 헤매어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늘 니가 말했듯 ‘알아서’ 해 주기를 바랬다. 겨우 빠져나온 터널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딸의 터널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딸의 터널속에서 같이 어둠을 겪기는 싫었다. 자신만의 터널이 있고, 자신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힘을 가지기를 바랬다. 그래서 외면했다. 눈물을 보이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딸의 눈물이 싫었다.

그 날 피곤한 탓이었을까. 정신없이 잠을 잤다. 딸은 자는 홍희의 옆에 서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 엄마가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나 엄마의 직접적인 말과 행동을 원하고 있는 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자신을 느꼈다. 반찬을 해주는 것보다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다독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고,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한데 도시락 반찬을 해주는 것만으로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다 해 주었다고 착각했다. 몸의 허기를 채워주는 것 만큼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 중요했다. 홍희는 아이의 방으로 갔다. 아이가 엄마의 목소리를 잘 들을수 있도록 큰소리로 말했다. 아이가 엄마의 마음을 잘 느낄 수 있도록,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아이의 흐르는 눈물이 반짝거렸다. 이 빛으로 아이는 긴 터널을 밝힐 수 있을까. 긴 터널을 빠져나올수 있는 희망이 될까. 힘이 될까.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지금 겪는 딸의 터널은 곧 끝이 나고 행복한 날이 올 것이다.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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