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서맥 서예가 리홍재 첫 개인전...대형붓 일필휘지 ‘타묵’, 정적 서예를 동적 예술로 승화
팔공서맥 서예가 리홍재 첫 개인전...대형붓 일필휘지 ‘타묵’, 정적 서예를 동적 예술로 승화
  • 황인옥
  • 승인 2024.03.0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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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초입에 1200평 규모 자리
가로 40m 규모 64폭 대형 병풍
가로 3m·세로 6m 족자 상설전
붓에 남았던 먹 활용 ‘타필비묵’
서예를 현대미술로 재해석 ‘창신’
‘10만1불전’ 조성 서예 부흥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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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산 리홍재가 자신의 신작 앞에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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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산 이홍재가 ‘팔공산 명산정’에 전시된 거대한 병풍과 족자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황인옥 기자

서예가인 리홍재의 예술이 새로운 공간에서 비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8월 팔공산의 자연과 동화사의 종교적 기운이 녹아있는 팔공산 초입에 대동방서예술문화관 ‘팔공서맥’이라는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팔공서맥의 가장 큰 특징은 규모다. 대구를 대표하는 팔공산과 대구 불교의 산실인 팔공산 초입이라는 지리적인 입지도 강점이지만 무엇보다 규모가 가히 압도적이다.

팔공서맥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총 3,996㎡(1,200평) 규모를 자랑한다. 대구 중구 봉산문화거리 내에 있는 그의 작업실 ‘도심명산장(道心名山藏·도의 마음을 길러 명산에 감추는 곳)’에서 느꼈던 공간에 대한 갈증은 충분히 해소되고도 남았다.

팔공서맥은 서예전용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국내에서 사설 서예전문 전시장을 운영하는 곳을 찾기도 어렵지만, 규모면에서도 팔공서맥을 대적할 만한 전시장도 드물다. 거대한 규모를 갖춘 팔공서맥은 작업실과 그의 상설전을 위한 공간, 그리고 동료선후배 서예가들의 특별기획 전시를 위한 공간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팔공서맥으로 공간을 옮기기까지 적잖은 고민이 있었다. 사실 주변의 만류도 컸다. 모두가 우려한 것은 대규모 공간을 운영하기 위한 예산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부담을 안더라도 공간을 옮겨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팔공서맥에선 △작품 규모의 제한 없이 자신의 작품을 상시적으로 전시하고 △새로운 화풍의 작업을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공간이 협소해서 제대로 보여줄 수 없었던 작품들을 대동방서예술문화관에서 보여줄 수 있게 됐고, 공간의 제약으로 시도할 수 없었던 작업들도 이제는 가능하게 됐어요.”

팔공서맥을 향한 그의 믿음은 현실이 되고 있다. 평소에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가로 40m 규모의 64폭 대형 병풍과 ‘용기봉덕(龍氣鳳德)’이라고 쓴 가로 3m, 세로 6m의 대형 족자의 상설전이 실현됐다. 두 작품 모두 규모가 규모인지라 국내에선 전시할 장소 찾기가 쉽지 않고 보관도 어려웠는데, 팔공산 공간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대형 작품을 보관할 곳이 없어 불구덩이 속에 들어갈 뻔했는데, 팔공산 공간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얻게 됐습니다.”

팔공서맥 시대를 개막하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점은 작업이 보다 자유로워졌다는 것. 실제로 그는 팔공산으로 작업실을 옮긴 후 신작 ‘타필비묵(打筆飛墨)’을 잉태했다. 그는 대형 붓으로 일필휘지로 서예를 쓰는 퍼포먼스 ‘타묵(打墨)’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의 타묵은 정(靜)적인 서예를 동(動)적인 예술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으며 국내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퍼포먼스 이후에 붓에 남아 있는 먹물이었다. 퍼포먼스가 끝나면 붓에 남아 있던 먹을 물에 씻어 버리는 것이 마냥 안타까웠다. 팔공산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영감이 떠올랐다.

“먹을 씻어낼 때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고, 남겨진 먹을 작업으로 활용할 생각을 하게 됐죠.”

신작 ‘타필비묵’은 대형 붓에 남아있는 먹을 활용해 그린 작품이다. ‘타필비묵’은 흡사 바람이 숲속을 헤집고 다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타필비묵’에는 우리 눈에 익숙한 수묵화와 결이 다른 새로운 형상과 기운이 배어있다. 일반적인 서예의 붓에서 불가능했던 큰 움직임 표현이 가능해지면서 얻은 효과다. 거대한 붓은 표현하는 방식의 변화로 이끌었다. 일반적인 붓이 글씨나 그림을 쓰고 그린다면, 대형 붓은 혼을 치고 두드리는 방식으로 순간적으로 완성하도록 이끈다. 이로써 그의 예술은 서예의 일필휘지의 혼돈과 과단성, 혼돈과 적요가 최정점을 달리게 됐다.

팔공산 시대를 개막한 리홍재에겐 “서투른 목수가 연장 나무란다”는 속담을 적용하기는 곤란하다. 좋은 연장을 만나자 그는 더 좋은 목수로 거듭나고 있다. 거대한 공간에 작업실을 꾸리면서 창작 활동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에게 새 공간은 작업의 효율성과 확장성이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게 다가온다. “팔공산으로 옮기면서 작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고 있습니다.”

리홍재 예술의 출발은 수묵화다. 특히 서예는 그에게 무한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된다. 특히 그는 한자 서예에 강한 애착을 드러낸다. 한자에 대한 그의 소신은 예술에서 출발해 실생활로 확장된다. “동양문화권이라면 실생활에서 한자와 한글을 병행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한자를 사용했고, 우리의 언어 속에 한자의 그림자가 남아있다는 것이 그의 인식이다. 실제 대한민국 국민의 99% 이상이 한자 이름을 쓰고, 지명의 95% 이상도 한자인 수치는 그가 왜 한자와 한글의 병행을 주장하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소리글자인 한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선 한자를 병행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선 한자의 뜻을 알아야 하고, 한자와 한글을 병용하는 것은 세상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리홍재가 한자와 서예가 푸대접 받는 현실에서 한자 서예를 고집하는 데는 “한자가 뜻글자이고 한글 속에 한자가 있다”는 관계성에 있다.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쓰면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한자 단어를 한글로 표기할 경우 독해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지금 우리 현실이 한글만 고집하면서 경제력은 세계최고 수준으로 올라왔는데, 독해력은 낮아지게 된 겁니다.”

그의 서예인생도 어언 60년이다. 그는 60여년 전, 영남 서예의 맥을 잇는 석재 서병오, 죽농 서동균, 죽헌 현해봉을 스승으로 정통 서예를 시작했다. 그는 서예를 예술의 영역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서예를 서도(書道)의 경지로 인식했다. 그런 인식 아래 일찍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는 학문 연구에 열정을 불살랐다. 사서삼경, 명심보감 등의 고전을 독학하며 자신의 세계관과 우주관을 확장해갔다. “고전 탐구를 통해 깨달은 이치들은 서예의 자유로운 운필의 자양분이 됐어요.”

지금은 대구를 대표하는 서예가 중 한 명이지만, 그에게도 방황의 시기는 있었다. 전통 서예를 익히는 법고(法古)에 스스로 만족할 수준이 되자 답답함을 느꼈고, 붓을 꺾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예가 숙명임을 깨닫고, 다시 붓을 잡았다. 그때부터 서예에 임하는 그의 자세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서예를 현대미술로 재해석하는 창신(創新)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지향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하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모아졌다.

“전통 수묵 예술에 현대성을 접목해 미래 예술의 경지로 격상 시키겠다”는 것이 당시의 그의 야망이었다.

그의 창신은 한자로부터 시작됐다. 표의문자인 한자의 형상이나 추상적인 이미지를 시각화라는 방향으로 창신은 전개된다. 당시 그는 “뜻글자인 한자를 형상에 기초해 회화로서의 가능성”을 찾아갔다. 한자를 자신만의 형태로 재창작해 중첩하거나, 형식과 구성에서 파격을 감행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엄격한 서예의 절제와 규율을 뛰어넘어 자유분방함을 즐기고 싶었어요. 서예의 자유분방함이야말로 현대미술의 핵심 맥락이라는 믿음이 있었죠.” 그는 자유분방함이 예술에 생기를 불어넣는 숨이라고 믿었다.

팔공서맥에는 서예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소장돼 있다. 이러한 자료는 서예전문 전시공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행보의 일환이다. 그는 또 서예가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는 현실에서 서예의 재부흥을 꿈꾼다. 꿈은 원대하지만 그 여정은 어려울 것임을 그는 알고 있다. 감내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음이다. 그러나 어차피 “예술은 고행을 먹고 사는 것”을 알기에 당당히 자신의 길 앞에 선다. 그는 서예의 부흥이라는 대의명분만 믿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려 한다.

그 시작이 현재 대동방서예술문회관에서 진행 중인 첫 개인전 ‘내 마음의 붓다·나의 부처님 일인일불(一人一佛) : 십만일불(十萬一佛)’전이다. “부처 불자를 서예 작품으로 써서 10만 1불전 조성하려는 일을 청룡의 해 갑진년에 시작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서예의 부흥을 이끄는 초석이 되었으면 합니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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