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일당에서] 매화음(梅花飮)...봄따라 제일 먼저 고개 내미는 꽃, 묵객 사랑 독차지
[호일당에서] 매화음(梅花飮)...봄따라 제일 먼저 고개 내미는 꽃, 묵객 사랑 독차지
  • 윤덕우
  • 승인 2024.03.1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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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매화 감상 모임 참가
홍·백·청매…멋진 자태 인상적
며칠 전 마당에 청매 묘‘심어
2~3년 후 꽃 피울 생각에 설레
꽃 시제 한시 중 매화 최다 언급
달빛 벗삼은 정취는 각별 예찬
이황은 107수 달하는 詩 짓고
매월당 김시습, 號로 애정 과시
지리산연기암백매
지리산 연기암 앞마당의 백매. 몇 년 전 봄에 가본 모습인데, 고목에 흰 꽃을 피운 모습이 그림 속 매화인 듯 매우 인상적이었다.

팔공산 아래 호일당 마을은 지금 매화가 한창이다. 어김없이 찾아온 꽃샘추위 덕분이다. 지난 1월 제주도 매화가 평년보다 46일 일찍 만개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대구도 평년보다 27일 빠른 지난달 27일 만개했다고 대구기상청이 밝혔다.

대구 곳곳에 매화가 다투어 피어나던 지난달 26일 저녁, 대구의 지인이 마련한 매화 감상 모임에 초청을 받아 다녀왔다. 10여 년 전 봄날, 매화 향기 가득한 대구 국채보상공원에서 친구들(화가 중심)과 술을 곁들여 매화를 감상하는 ‘매화음(梅花飮)’을 즐긴 적이 있다. 이번에 오랜만에 분위기가 다른, 더욱 ‘격식’을 갖춘 매화음을 즐기는 자리를 가졌다. 기업인, 음악인, 시인 등 10여 명이 함께 했다.

◇다양한 매화 한자리에서

먼저 지인의 정원을 둘러보며 매화를 감상했다. 연못가에 자라는, 소나무와 대나무 등 사이에 있는 홍매와 백매 등이 절반 이상 피어나 매화를 감상하기에 적당했다. 따로 조성된 정원은 그 자체가 보기 드물게 잘 가꾼 공간이었는데, 매화나무의 수형도 멋져 매화 핀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은은한 매화 향기에 취한 채 주택으로 발길을 옮겼다.

주택 앞의 정원에도 홍매와 백매 고목들이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택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 안에 조성된 작은 중정이 있고, 그곳에는 청매와 용매가 멋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작은 연못 양쪽에 자라고 있는데, 청매는 절반 정도 개화했다. 큰 줄기가 용의 몸통처럼 생긴 용매는 흰 꽃이 만개한 상태였다. 청매는 뒤에 늘어선 오죽들과 어울려 각별한 멋을 선사하고 있었다.

앞 뒤 정원에 피어난 다양한 매화를 보며 매실주와 와인을 즐겼다. 매실주는 정원의 매실로 담근 것이었다. 주택 곳곳에는 매화시를 담은 서예작품이 걸려 있었고, 주인은 이 시를 비롯해 집안 곳곳에 있는 토기, 도자기, 서예 등 미술품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가장 먼저 소개한 매화시는 중국의 무명 비구니스님이 지었다는 ‘심춘(尋春)’이었다.‘하루 종일 봄을 찾아 다녔지만 봄은 보지 못하고(盡日尋春不見春)/ 짚신 발로 온 산을 헤매며 구름만 밟고 다녔네(芒鞋踏遍 頭雲)/ 집에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歸來偶過梅花下)/ 봄은 가지 끝에 이미 한창이더라(春在枝頭已十分)’

음식을 즐긴 후에는 자리를 옮겨 대금 독주를 즐겼다. 흡족한 연주였다. 마치고 문밖을 나서니 엷은 흰 구름을 배경으로 둥근달이 매화를 비추고 있었다. ‘매화 잘 그리기로 조선 제일’이라는 찬사를 들은 어몽룡의 월매도(月梅圖)가 떠올랐다.

‘심춘’은 필자도 좋아하는 매화시다.
 

김홍도백매-간송미술관
단원 김홍도의 ‘백매(白梅)’. 간송미술관 소장

◇좋아하는 매화시

한시 매화시 몇 수를 더 감상하며, 떠나가는 올해 매화에 대한 아쉬움과 여운을 음미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한국의 시인묵객들은 옛날부터 매화를 정말 사랑했던 것 같다. 한국 역대 문집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이들 문집에 수록된 한시 중 매화를 읊은 시가 가장 많았다. 꽃을 읊은 시 중 매화가 727회, 연꽃 435회, 국화 405회, 도화 233회, 행화 91회, 이화 80회, 난초 75회, 모란 71회 등 순으로 나타났다.(이상희 저 ‘매화’/2002년)

이처럼 매화를 압도적으로 많이 시제로 읊은 것(106종 3,006 수 중 24%)은 매화가 그 만큼 많이 사랑받았음을 말해준다.

먼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1435~1493) 시 ‘탐매(探梅)를 보자.

‘크고 작은 가지마다 휘도록 눈이 쌓였건만(大枝小枝雪千堆)/ 따뜻함을 알아차려 차례대로 피어나네(溫暖應知次第開)/ 고결한 매화는 비록 말이 없어도(玉骨貞魂雖不語)/ 남쪽 가지 봄뜻 따라 먼저 꽃망울을 틔우네(南條春意取先胚)’

김시습의 ‘탐매’ 14수 중 첫 수다. 매월당이라는 호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매화와 달을 중요한 시 소재로 삼았다.

매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달빛과 어우러진 매화는 특히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청아하게 피어난 매화에 교교한 달빛이 내리는 풍경이 선사하는 운치에 수많은 시인과 선비들이 찬사를 보냈다. 이런 월매는 그림의 소재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의 연작시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중 일부다.

‘홀로 창가에 기대니 밤기운이 차가운데(獨倚山窓夜色寒)/ 매화나무 가지 끝에 둥근 달이 떠오르네(梅梢月上正團團)/ 굳이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 불어오니(不須更喚微風至)/ 맑은 향기 저절로 집안에 가득하네(自有淸香滿院間)’

‘나막신 신고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나를 따라오네(步 中庭月 人)/ 매화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梅邊行繞幾回巡)/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夜深坐久渾忘起)/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香滿衣巾影滿身)’

매화가 한창이면 매화나무 아래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매화를 완상하던 이황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다.

‘내 평생 즐겨하는 것이 많으나 매화를 지독하게 좋아한다‘라고 했던 이황의 매화 사랑 또한 유명하다.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지은 이황은 운명하기 몇 시간 전 시중을 드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저 매화 화분에 물을 주도록 해라”고 말했다.

매화를 소재로 한 선시 하나를 소개한다. 가끔 등산을 겸해 찾아가보는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의 관음전 주련 글귀이다. 고려 후기 스님인 진각 혜심이 편찬한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나오는 시다.

‘서리 바람 땅을 휩싸며 마른 풀뿌리 쓸지만(霜風括地掃枯 )/ 봄이 벌써 온 걸 그 누가 알리요(誰覺東君令已廻)/ 고갯마루 매화만이 그 소식 알리려고(唯有嶺梅先漏洩)/ 가지하나 홀로 눈 속에서 피었네(一枝獨向雪中開)’

사랑하는 사람을 이별하는 때 매화가 피어있으면 어떨까.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최고의 여성 시인으로 꼽히는 이매창의 시 ‘자한(自恨)’이다.

‘봄바람 불며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東風一夜雨)/ 버들잎과 매화가 다투어 피었구나(柳與梅爭春)/ 이런 봄날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對此最難堪)/ 술동이 앞에 놓고 임과 헤어지는 일이네(樽前惜別人)’

20일 전 쯤 호일당 마당(텃밭) 우물가에 매화나무(청매) 묘목을 하나 심었다. 2~3년 후면 맑고 고운 꽃을 피우기 시작하리라. 이 청매 꽃이 피는 날을 해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멀리 매화를 찾아가지 않아도, 매화 가지를 꺾어와 화병에 꽂아두지 않아도 차례로 피어나는 맑디맑은 매화와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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