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쿵' 의성 국가지질공원 이야기] (2)금성산(金城山) 7천만년 전 분출, 백두·한라산의 아버지 산
['심쿵' 의성 국가지질공원 이야기] (2)금성산(金城山) 7천만년 전 분출, 백두·한라산의 아버지 산
  • 윤덕우
  • 승인 2024.03.2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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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금성산 정상에 묘를 쓰면 3대가 발복” 속설
풍수지리가 “하늘이 내린 영산”
암매장 시신 파내고 묻기 반복
묘지 쓰면 흥하지만 일대 가뭄
흉작든 어느 해엔 파묘 사건도
금성산 중심 못 600여개 분포
고도차 따라 못과 못 연결하고
수통·못종 이용 관개배수 형태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0호 등재
 
의성금성산-11월초
천의 얼굴을 가진 금성산. 보는 위치에 따라 모습이 참으로 다양하다. 지방도를 따라 봉양면에서 금성면으로 오다보면 그 모습이 공룡 티라노사우루스나 어린왕자에 나오는 보아뱀이 연상된다. 기골이 장대한 근육질의 남성미 넘치는 산이다.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북동쪽에 있는 금성산(金城山, 해발 531m)은 백두산·한라산 보다도 훨씬 더 나이가 많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기골이 장대한 근육질의 남성미 넘치는 명산이다. 봉양면에서 금성면으로 오면 금성산 정면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흡사 공룡 티라노사우루스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보아뱀을 연상케 한다. 금성산을 직접 보면 “과연 그렇구나” 공감할 수 있다. 금성산은 보는 위치나 계절에 따라 그 모습이 참으로 다양한 천의 얼굴이다.

이제 금성산의 생성 비밀을 파헤쳐보자. 금성산 일대 화산암층은 약 400m 두께로 보고되어 있는데, 하부에는 현무암질암류가 얇게 노출되어 있고, 상부에는 유문암질암류가 두껍게 놓여있다. 오늘날의 형태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 화산활동이 매우 격렬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당시 화산이 분출한 뒤 분화구 인근이 붕괴·함몰되어 큰 냄비모양의 분지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칼데라’라고 한다. 칼데라는 남북방향으로 긴 타원형이며, 직경 8km×10km 크기이다. 현재 가장 높은 봉우리는 비봉산(670.5m)이다. 칼데라 지형의 안팎을 이루던 화산암은 7천만 년 동안 깎여나가 현재는 칼데라 밑부분만 남아있는 형태이지만, 그 흔적으로 당시의 칼데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화산체가 붕괴·함몰될 때, 화산분출 전 이 지역에 있던 기반암도 함께 기울어졌다. 금성산 주변 퇴적암들이 금성산을 향해 기울어져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제오리 공룡발자국, 만천리 아기공룡발자국도 그 예이다.
 

금성산-비봉산-마늘논
가음면에서 찍은 금성산(왼쪽)과 비봉산. 금성산과 비봉산을 중심으로 남북방향으로 긴 타원형(직경 8km x 10km)의 칼데라가 형성됐으나 오랜 세월 동안 깎여나가 현재는 칼데라 밑부분만 남아있다. 의성군 제공

금성산(金城山) 이름 이외에도 다양한 산명(山名)이 있었다. 특히 조선 시대 억불숭유정책에 따라 산골짜기마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차고 넘친다고 해서 영니산(盈尼山). 풍수지리가들은 산 모양이 아침햇살을 받으면 나래를 펴고 날아오르는 학과 같다고 금학산(金鶴山). 한양성(漢陽城)에서 보니 진방(辰方, 동남쪽)에 하늘(天)이 내린 영산(靈山)이라고 천진산(天辰山). 천문학에서 28수의 진성(辰星, 오늘날 水星 Mercury)이 걸려 있는 산이라고 해 천진산(天辰山)이라고 했다. 가장 흔히 가마(轎駕) 모양이라고 해서‘가마산’ 혹은 한자로 ‘교산(轎山)’이라고 했다.

1454년 간행 세종실록지리지 , 1861년 대동여지도 및 1872년 지방지도에서는 영니산이라고 적고 있다. 1611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의성현 산천조에서 금학산과 금성산이라고 적혀 있다.
 

금성산-산운마을작약
금성산 기슭의 산운마을 작약꽃. 산운마을은 영천 이씨 집성촌으로 ‘대감마을’로도 불린다. 사진 왼쪽이 금성산, 오른쪽이 비봉산이다.

 
금성산 정상
금성산 정상이다. 면적은 1천여평 정도다. 명당으로 알려지면서 한때 암매장이 성행해 파묘가 빈번했다

예로부터 금성산이 “하늘이 내린 남쪽 영산” 혹은 “진성 별빛이 쏟아지는 산” 이라는 사실에 풍수지리가들이 눈독을 들였다. 영화 ‘파묘’가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파묘는 거액의 돈을 받고 수상한 묘를 이장한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담은 오컬트 미스터리 영화다. 개봉 한 달 만에 관객이 1천만명을 훌쩍 돌파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세칭 명당이 가장 많은 산이 바로 금성산이다. 금성산 정상 1,000여 평에다가 묘지를 쓰면 “묘지 쓰고 난 뒤 3달부터 시작해, 3년째 크게, 3대까지”명당발복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남들 몰래 시신을 금성산 정상에 암매장했다. 암매장 시신을 파내고 다른 사람의 시신을 다시 묻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파묘를 막기 위해 콘크리트까지 사용하기도 했다. 묘지를 쓴 사람은 불같이 흥했지만 금성면 일대에는 극심한 가뭄이 든다는 속설이 따랐다. 그래서 지역주민들은 금성산 매장을 금기시했다. 그러함에도 명당발복을 원했던 힘 있는 사람들은 몰래 암장하는 사례가 빈발했다. 심지어 헬기까지 동원해서 시신을 묻는 사례도 있었다. 1973년에 금성면 일대에 가뭄이 극심해 사상 최악의 농작물 흉작이 예상됐다. 결국 산기슭에서 농사짓던 농부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금성산으로 올라갔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는데도 암장묘지를 파헤치는 파묘사건이 발생했다. 1973년 금성산 농민이 파묘했다. 기우제를 지내는 일이 자주 있었고 파묘를 하면 신기하게도 비가 내렸다.

의성에는 마늘이 유명하다. 의성마늘은 고품질의 한지 마늘로서 전국 1위의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다. 금성산 화산재로 인한 마그네슘, 유황, 칼륨 등의 풍부한 토양무기물 덕분에 마늘, 과일, 채소, 수수, 참외 등 황금작물 재배에 최적지가 되었다.

마늘은 원산지가 이집트다. 고대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를 세우는 대역사를 하던 인부(노예)들은 강장제로 마늘을 먹었다. 우리나라는‘삼국유사’ 단군신화의 육식성 호랑이는 마늘을 먹지 못했다. 그러나 잡식성 곰은 마늘을 맛있게 먹었다. 그때 마늘은 “곰을 인간으로 환생시킨 영약”이었다. 삼국유사 테마파크에 가면, 마늘을 먹었던 “곰의 땅굴”이 금성면 인근인 삼국유사면에 2021년1월1일부터 있다. 이를 미뤄보면 아마도 단군을 낳은 그 곰이 의성마늘을 먹지 않았을까? 생각도 한다.

비닐하우스나 멀칭 재배가 아닌 의성 한지 마늘엔 7천만 년 전 금성화산에 화산활동으로 활활 타오르던 세찬 불기운이 서려 있다. 게다가 혼자서 의성을 지키겠다고 929년 7월14일에 견훤 대군에 맞섰던 홍술(洪述, 출생미상 ~ 929년 7월14일) 장군의 전사했던 매운 충정이 마늘 맛에 녹아있다. 오늘날까지도 “의로운 성(義城)” 내 의성군민의 따듯한 정성도 마늘 속에 깃들어 있다.

의성마늘의 재배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조선11대 중종 21년(1526년)에 현 의성읍 치선리(선암부락)에 경주 최씨와 김해 김씨 두 성씨가 터전을 잡게 되면서 재배되었다고 전해진다.

고유명사화 되어버린 ‘의성마늘’은 한지형마늘로 쪽이 6~8쪽이라 육쪽마늘로 불린다. 논에서 이모작을 통해 수확되며, 수확시기는 6월중순 이후다. 햇마늘이 판매가 된다고 해도 7월이 넘어간다. 그 이전에 나오는 것은 의성마늘이라고 보기 힘들다.

구가 단단하고 저장성이 좋으며 특유의 향과 강한 매운맛은 의성마늘의 자랑이다. 또 즙액이 많아 적은 양으로 양념하기가 좋다. 화산재 무기물과 유기적 퇴적토양에서 재배했기에‘흙의 정령’들이 달큰한 맛으로 나타난다. 이런 의성 마늘의 항암, 항생, 항스트레스성 물질로 건강기능식품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금성산-가음지-금성탕지
가음지에 비친 금성산의 또다른 모습. 의성군 제공

의성군 일대에는 금성산을 중심으로 600여 개의 못이 분포한다. 바로 의성군이 2018년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0호로 등재한 ‘의성 전통수리 농업시스템’이다. ‘의성 전통수리 농업시스템’은 물이 부족한 금성산 일대에 고대부터 영농에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선조들이 만들어 온 못과 관련한 수리농업 시스템이다. 고도차에 따라 못과 못이 연결되고, 수통과 못종을 이용한 전통관개배수의 형태를 계승하고 있다. 지금봐도 물을 이용하는 조상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의성 전통수리 농업시스템’은 2022년 10월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열린 제24회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총회에서 세계관개시설물유산으로도 최종 등재 됐다. 세계관개시설물유산은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 사회적, 기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관개시설물을 지속 보전·관리하고 홍보하기 위해 국제관개배수위원회에서 2014년부터 운영하는 제도이다.

 

용왕 BC 124년 조문국 건국
사적지 제1호 고분 경덕왕릉
봉분둘레 1인 1일 작업량 계산
2만7천명·영토 1천256㎢ 추정
의성 유일 국보인 5층 석탑
목화 시범 재배지·대감마을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수정사
에코센터 등 관광명소 ‘다양’


금성산 아래 금성면 대리리 372번지 일대 조문국 사적지에는 경덕왕릉 등 200여 기의 고분군 금성면 고분군이 있다. 인근 조문국 박물관은 옛 조문국 옛터를 설명하고 있다.

조문국(召文國)이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예족계통(濊族系統)의 부족국가였다. BC 124년에 건국한 제1대 용왕(龍王, BC 124 ~ BC 119)으로부터 제21대 묘초왕(妙楚王, AD 228~ AD 245)까지 370년 동안 진한(辰韓) 땅에 존립했다. 시조(始祖)는 후한서(後漢書) 예편(濊篇)의 예왕(濊王) 남려(南閭)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는 BC 128년에 28만 명의 백성이 있는 반우거(畔右渠)를 요동성에 예속시켰다. 이곳에다가 한무제(漢武帝)는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다. 2~ 3년 후에 창해군은 없어졌다. 그 후 BC 124년에 한반도에 와서 이곳 금성산 기슭 아래에서 조문국을 건국했다. 조문국 왕계통보에 대해서는 신라사초에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신라사초를 보고 필요한 부분만은 발췌했다.

조문국에 대해 삼국사기는 “벌휴이사금 2(185)년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로 하여금 조문국 정벌을 위해 좌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군주라는 칭호는 이때부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허목((許穆, 1595~ 1682)의 기언별집(記言別集)에서“국가의 흥망은 몇 년이든가? 만물의 이치는 무상한 법이라는데.” 라는 시문과 “나는 경덕왕이다. 아무개 곳을 살펴보고, 무덤을 개수하고 봉안하라.”고 의성 현감의 꿈에 현몽했다는 설화기록으로 남아있다.

조문국 사적지 제1호 고분인 경덕왕릉은 정남향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들머리 섶에는 이름 없는 묵객이 쓴‘조문국 그때 모란꽃’이란 시가 있다. “꽃은 옛 나라의 번성한 빛을 머금고, 뿌리는 지난 왕조에 그리운 마음을 품었다.” 해마다 관민이 경덕왕릉에 춘계향사를 드린다. 왕릉의 봉분 둘레가 74m이고, 높이가 8m다. 봉분 토사량이 자그마치 4천674톤이 넘는다. 8톤트럭 581대 분량이다. 이 봉분 토사량을 기준으로 1인당 1일 작업량으로 나누면 부역에 동원된 인력이 나온다. 이를 기반으로 부역한 인력과 인근에 거주한 백성의 수를 추계할 수 있다.

당시 1인당/1일에 500kg(0.5톤)씩 운반작업을 한다면 9천296명의 부역할 백성이 필요하다. 그곳에 살았던 백성은 부역에 동원된 인력(장정)의 3배 이상인 2만7천888명 내외가 조문국 백성)으로 살았다. 오늘날 의성군민의 56%가 조문국(召文國) 때 이미 이곳에 거주했다. 당시 부족국가의 영토면적은 사방백리(四方百里) 정도였다. 수만 명의 백성을 가진 백리소국(百里小國) 혹은 만인백성(萬人百姓)이었다. 그래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서는”작은 나라에 옹기종기 행복하게 사는 백성이라고 했다. 맹자(孟子)에서도 백리소국(百里小國)이라고 했다. 소국의 영토면적은 오늘날 100리 40km(반경 20km)로 계산하면 1천256㎢ 내외가 국가영토였다.

위에 말한 것 외에도 금성산 주변에는 관광명소가 너무나 많다. 수정리에 있는 나라의 기둥인 고관대작이 많이 배출했던 산운(山雲) 대감마을, 옛 산운초등학교 폐교를 이용한 의성에코센터(산운생태공원 내). 그리고 신라 신문왕때 의상대사(義湘大師, 625 ~702)가 창건한 수정사(水淨寺)가 있다. 탑리리에는 의성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5층 석탑이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오층석탑으로 높이가 9.6m이며 벽돌모양으로 쌓아올린 전탑과 목조건축의 수법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이한 구조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다. 각부의 석탑재가 거의 완전하여, 전탑(塼塔)의 수법을 모방하는 한편, 일부에서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발달을 고찰하는데 귀중한 유례가 되는 탑이다. 기단부는 14매의 장대석으로 구축된 지대석 위에 이뤄졌는데, 24매의 판석으로 면석을 구성하였고,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 2개씩의 안 기둥이 모두 별석으로 되어있다. 덮개돌은 8매의 판석을 결구하여 덮었는데, 부연은 표시되지 않았으며, 덮개돌 상면에는 1단의 굄돌을 놓아 탑의 몸돌을 받치고 있다. 경주 분황사(芬皇寺) 석탑 다음으로 오래된 석탑으로 한국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석탑의 재료는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백악기 유문암질 응회암(Cretaceous rhyolitic tuff, 流紋巖質 凝灰巖)으로 금성산 암석과 동일 성분으로 밝혀졌다.

제오리에는 고려말 문익점(文益漸)이 목화를 보급하기 위한 시범 재배지가 있다. 고려 공민왕때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3년 후 귀국할 때 금주성에서 면화종자를 붓뚜껑에 넣어 귀국하여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으로 하여금 경남산청(山淸)에 시험재배한 것이 우리나라 면작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조선 태종 때 그의 손자 승로(承魯)가 의성 현감으로 부임하여 금성면 제오리(金城面提梧里)에 면화를 파종하여 오늘에 전하게 됐고, 1909년에 지역주민들이 파종한 원전(元田)에 기념비를 세워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91년 김우현(金又鉉)도지사 재임시 주변을 정비하고 면화를 파종하여 선생의 큰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바로 그 옆에는 2023년 6월21일 의성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받은 지질명소 제오리공룡발자국 화석산지가 있다. 만천리(晩川里)엔 아기공룡 발자국이 있다. 금성산 기슭 아래 운곡리(雲谷里)는 ‘꽃돌’ 산지다. 세칭 보석의 가치가 있는 ‘꽃돌(靑松花紋石)’이란 세칭 보석의 가치가 있는 구과상 유문암(球顆狀流紋岩)으로. 용도는 참으로 다양하다. 꽃 혹은 화려한 무늬를 이용한 장식용 골재로 쓰이고 있다. 옛날에는 화살촉, 치수석재(dimension stone), 절삭공구 혹은 연마재(abrasive) 등에 사용되고 있다. 특히 보석(jewelry)으로도 가공되고 있다.
 

 
글 =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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