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일당에서] 봄버들, 금호강변 따라 펼쳐진 초록 봄빛...눈도 마음도 즐겁구나
[호일당에서] 봄버들, 금호강변 따라 펼쳐진 초록 봄빛...눈도 마음도 즐겁구나
  • 윤덕우
  • 승인 2024.03.2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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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이 꽃피우는 시기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점점 짙어지며 존재감 드러내
수양버들·왕버들·갯버들 등
종류 따라 다양한 초록의 세계
공항교 부근 금호강 봄버들
대구 공항교 부근 금호강변의 봄버들 풍경. 지난 24일의 모습인데, 구름 가득한 날씨여서 버들의 봄빛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시골집 호일당 마을에 매화가 한창 피어나던 3월 중순부터는 매화에 이어 버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버들의 연둣빛이 날마다 더욱 짙어지는 모습을 보며 봄 정취에 빠져드는 나날을 보냈다.

대구 아파트에서 호일당으로 가는 길은 금호강을 건너는 공항교를 지나 금호강변을 따라 나 있는 이시아강변로와 연결되다. 승용차로 이 길을 지나가면 금호강 물가와 강변 둑 곳곳에 왕버들, 수양버들 등 버들이 가까이 또는 멀리에서 눈에 들어온다. 이른 봄에는 시골집을 오가며 나날이 변하는 이 버들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이시아경변로를 지나 이어지는 길도 팔공산 파계사 주변에서 내려오는 물들이 흐르는 하천을 따라 이어진다. 그 하천변에도 곳곳에 수양버들이 기분을 싱그럽게 하는 새봄의 초록빛을 선사하고 있다. 드문드문 서 있는 버들도 있고, 무리 지어 숲을 이루고 있는 버들도 있다. 오가는 길에 만나는, 나날이 변하는 버들의 봄빛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들기도 한다.

버들의 봄빛은 처음에는 일부러 눈길을 주지 않으면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회색빛 천지 속에 안개 속처럼 흐릿하게 그 빛을 드러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주 옅은 연두색이나 녹황색으로 서서히 그 존재를 드러내는데, 어떤 색인지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다.

가지 전체에 꽃봉오리를 맺고, 꽃이 피고, 수많은 잎들이 싹트면서 연초록에서 점점 진초록으로 변해간다. 버들의 봄빛은 수양버들, 왕버들, 갯버들 등 그 종류에 따라 약간씩 다른 빛깔을 보여준다. 시기에 따라, 종류에 따라 노란 황금빛에서 진초록까지 다양한 초록의 세계를 펼쳐낸다. 대구에는 지금 이런 버들의 찬란한 봄빛이 완연하다.

지난 15일을 전후해 3일 정도 낮 기온이 섭씨 20도 전후를 오가는 고온 날씨가 계속되면서 목련, 개나리, 자두 등의 꽃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버들의 연둣빛은 점점 짙어 지며 그 존재감을 더욱 드러냈다.

어릴 때는 봄버들이 친구가 되기도 했다. 물이 오른 갯버들 가지는 껍질이 허물 벗듯이 잘 벗겨진다. 이 껍질로 만든 호드기를 불며, 서로 호드기 소리 경쟁을 하며 노는 것이 당시 아이들의 대표적 봄놀이였다.

 

밤비에 새잎 나거든
조선시대 기생 홍랑의 시조
연인 최경창과 이별하며 지어

보낼 수 밖에 없는 애절한 사연

버들가지에 빗대어 마음 전해

◇밤비에 새잎 나거든

버들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했는데, 버들과 관련한 여러 습속이 전한다. 그중 하나로 헤어지는 사람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풍습이 있었다. 버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와 관련한 멋진 한글 시가 있다. 조선 시대 기생 홍랑(洪娘)의 시조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홍랑이 연인인 고죽(孤竹) 최경창(1539~1583)과 이별하며 지은 시다. 연인을 떠나보내는 애절한 마음을 버들가지를 빌려 표현한 시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시로 꼽힌다.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이자 선비인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 이야기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사연을 담고 있기도 하다.

뛰어난 시인이기도 한 최경창은 1568년 과거시험(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73년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병마절도사의 문관 보좌관으로 함경도와 평안도에 파견된 병마평사의 약칭)로 부임한 자리에서 함경도 홍원 태생의 기생인 홍랑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가 부임 후 관청 소속 기생들을 소집해 점검하는 ‘점고(點考)’ 자리에서다.

이날 점고에 이어 최경창의 부임 축하 연회가 열렸고, 연회가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기생으로서 재능과 미모에다 문학적 소양까지 겸비한 홍랑이 시 한 수를 음률에 맞춰 읊었다. 홍랑이 읊은 시는 놀랍게도 최경창의 작품이었다. 최경창은 다 듣고는 내심 놀라워하면서 홍랑에게 넌지시 읊은 시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누구의 시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홍랑은 “고죽 선생의 시인데 그분의 시를 제일 좋아한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각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갔다. 홍랑이 최경창의 군막에까지 드나들 정도로 두 사람은 잠시도 서로 떨어져 있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6개월이 지난 이듬해 봄 최경창이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홍랑은 몸살을 앓을 정도로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최경창이 한양으로 떠나던 날 홍랑은 최경창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관기로서 가고 오는 것이 허락된 관할지역 끝까지 따라갔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서 최경창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돌아서야만 했다

. 홍랑이 최경창을 보내고 돌아올 때 함흥으로부터 70리 밖에 있는 함관령(咸關嶺)에 이르자 날은 어두워지고 비까지 내렸다.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담은 시조 ‘묏버들 가려 꺾어’를 지었다. 그리고 이 작품과 함께 고갯마루 길가의 버들을 꺾어 최경창에게 보냈던 것이다.

가슴 충만하게 하는 두 사람의 사연은 계속 이어진다. 1583년 45세 나이로 최경창이 갑자기 별세하자, 홍랑은 경기도 파주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며 10년 동안 최경창의 묘를 돌보는 시묘살이를 했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 터지자 그의 작품 지키기 위해 유품을 챙겨서 가슴에 품고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돌아가 지켜냈다.

홍랑이 해주최씨 문중을 찾아 최경창의 유품을 전한 것은 1599년의 일이다. 참혹한 임진왜란이 모두 끝난 이듬해였다. 무려 7년에 이르는 전란을 겪으면서도 오늘날까지 최경창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전해져 오는 것은 오로지 홍랑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 덕분이다.

홍랑이 죽자 해주최씨 문중은 그녀를 가문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녀를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주었다. 시신을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밑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1969년에는 해주최씨 문중이 그녀의 묘 앞에 묘비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를 세웠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청석초등학교 북편 산자락에 있는 해주최씨의 문중 산에 고죽 최경창의 묘소와 그녀의 무덤이 있다.

지금은 버들이 봄빛 경쟁에서 개나리, 자두, 목련 등에게 양보하고 있다. 대구시내에는 벚꽃이, 주변 산에는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했다. 온갖 초목들도 다투어 새싹을 틔우고 있다. 만화방창의 봄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날이 새롭게 펼쳐지는 찬란한 봄세상을 온전히 누릴 수 있으면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봄세상의 주인은 따로 없다. 빈부귀천과도 무관하다. 봄날의 자연뿐만이 아니다. 이런 자연이 선사하는 선물은 그것을 누리는 자가 주인이다. 이런 선물을 누구나 잘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행복한 삶으로 가는 지름길이 따로 있을까 싶다.

 

글·사진=김봉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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